배용준과 헌책방
배용준과 헌책방
  • 북데일리
  • 승인 2007.02.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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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용준

[북데일리] 헌책방 ‘합서점’ 앞으로 옵니다. 자전거를 타고 슬금슬금 종로구 구석구석을 돌다가 이곳까지 옵니다. 따뜻한 봄기운이라기보다 어느새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느껴지는 5월하고도 열셋째 날. 토요일 낮이라 그런지 학교 앞은 조용합니다. ‘합서점’ 둘레에 있는 문방구들은 가게 앞에 ‘배용준’ 사진을 앞에 내걸며 장사를 하고, 중앙고등학교 대문부터 그 앞길 500미터 즈음은 새로 깔아 놓은 돌이 반들반들합니다.

자전거를 ‘합서점’ 앞에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때, 틀림없이 가게 간판은 ‘합서점’인데, 가게 안에 놓인 물건은 ‘배용준 사진’과 ‘한국 관광 기념품’ 들. 무슨 일이 있나?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슬그머니 문을 밀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조금 뒤, 건너편 문방구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오더니 ‘무슨 볼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책 구경을 하러 왔는데 책방이 문을 닫았느냐’고 되묻습니다. ‘여기 아주머니는 그대로 계신다’고 하더니 제 위아래를 슥 훑어본 뒤 돌아갑니다. 아마 저를 일본 관광객쯤으로 여긴 듯. 생각해 보면, 헌책방 〈합서점〉에 책을 구경하러 찾아오는 사람은 적지만, ‘연속극 겨울연가를 찍은 중앙고등학교’에 구경하러 찾아오는 사람은 많습니다. 중앙고등학교 대문 옆에 세워진 큼직한 알림판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교내 구경시간’을 적어 놓았고, ‘겨울연가를 어느 자리에서 찍었고 이곳에서 찍은 연속극이 언제 방송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꼼꼼히 밝혀 줍니다(한국말과 일본말로). 아마, 중앙고등학교 교사들 가운데, 또 학생들 가운데, 자기들이 다니는 학교 바로 옆에 헌책방 하나가 오랜 세월 붙어 있음을 느끼거나 아는 이는 아주 드물겠지요. 헌책방이 있어도 교재 살 때나 찔끔찔끔 들여다볼 뿐, 교재 아닌 책을 살피며 마음 밭을 일구려는 아이들은, 또 교사들은 없었겠지요. 그렇겠지요.

서운한데다가 씁쓸한 마음.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책방 둘레 모습을 여러 장 담습니다. 하지만 왜 이리도 슬픈지. 더위를 식히며 잠깐 쉬고 있을 무렵, 〈합서점〉 아주머니가 가게로 옵니다. 제 얼굴을 알아보시며 활짝 웃고 반겨 주십니다. ‘이 더운데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네’ 하면서, ‘보다시피 헌책 장사가 안 되잖아’ 하십니다. ‘헌책 장사하는 것보다 이런 기념품 파는 장사가 잘될 거라면서, 줄곧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서(자기한테 가게 빌려 달라고) 아주머니 당신도 새 헌책 갖추기 힘들고, 사러 오는 사람도 적어서 가게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조금밖에 없지만 안쪽에 책이 남았는데 구경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럼요. 많든 적든 책이 있으면 돼요.’ 하면서 안쪽 자리로 들어섭니다. 문지방 사이로 천 하나 걸쳐 놓고 칸을 나누었네요.

아주머니 말씀처럼 책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여느 책방 책꽂이 하나 부피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남대문이나 명동이나 인사동에서도 살 수 있는 관광 기념품’이라든지, ‘일본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흔한 배용준 사진’보다는, ‘한국말로 된 헌책’을 좀 더 앞에 내세워서 ‘한국을 좀 더 알고자 하는 일본 관광객’을 맞이한다면 더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글쎄, 이런 생각은 저 같은 사람이나 하는 생각일까요. 아주머니한테도 이런 말씀을 드려 봅니다. 아주머니는 ‘빌려 주기로 했으니 이렇게 둘 수밖에 없다’며, ‘그런데, 생각보다 기념품 장사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주머니로서는 당신 남편과 함께 꾸려 오던 이 헌책방을 고이 이어가는 일이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한결 홀가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장사가 안 되고 벌이가 안 된다면, 하나 있는 딸내미를 가르치고 키우기 어렵습니다. 기념품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한테 가게를 빌려 준 뒤, 다문 몇 푼이나마 받는다면 넉넉하지는 않아도 어느 만큼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게를 빌려 쓰는 이도 그다지 장사가 안 되는 듯해서, 아주머니 마음이 가볍지 않겠구나 싶습니다.

<2〉 골치 아픈 책, 촘스키

가까스로 목숨을 잇는 책꽂이를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책꽂이가 조금만 남았기에, 꽂힌 책을 살피기 쉽습니다. 아니, 금세 다 훑습니다. 가만히 이 책 저 책 만지작거리다가 <노암 촘스키>(이후. 2001)를 고릅니다. 흠, 쉽게 읽을 만한 책으로 느껴지지 않으나, 한 번 도전해 볼까요.

.. 다시 한 번 기자, 군사 전문가, 군인들의 보고를 통해 이스라엘 언론이 주도면밀하게 회피한 사실에 주목해 보자 .. 〈18쪽〉

‘세모(트라이앵글)’를 이루는 세 나라, 팔레스타인(또는 이스라엘을 뺀 중동)과 이스라엘과 미국이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살피는 책입니다. 참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엮어 나가는구나 싶으며 놀라는데, 이러저러한 자료보다는 노암 촘스키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 미국 정부기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샤론 국방장관과 에이탄 참모총장은 테러리스트의 아지트인 레바논을 ‘정화’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학살 작전’은 정당하며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은 모든 전쟁의 대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 〈124쪽〉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할 때에는 섣불리 ‘주장’을 내세울 수 없겠다 싶습니다. 수많은 거짓말이 오가고 있으며, 눈속임이나 눈가림도 끊이지 않고, 했던 말을 바꾸고 이 자리와 저 자리에서 다르게 말하며 구렁이 담 넘듯이 큰소리치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온갖 자료를 그러모아 찬찬히 풀어내는 길이 가장 ‘객관’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일 수 있어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거짓말이 아닌 참말을 보여주며’ 우리 스스로 참과 거짓을 가리도록 하는 길 말입니다.

.. 작전의 규모와 사상자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가 생략할 수 있는 많은 거짓말과 얼버무리기를 제외하더라도, 이스라엘 정부는 마침내 100?150명의 기독교 민병대를 난민촌에 보냈다고 인정했다. 마지막 공식적인 이야기는 이들이 PLO가 하빕 협정을 어기고 난민촌에 남겨둔 2천 명의 중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을 ‘청소’하기 위해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 9월 18일에 발표된 잔학행위 보도에 이스라엘이 처음 보인 반응은 “우리는 증거 없이 주장되는 학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IDF대변인)”는 것이었다. 난민촌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에 대한 미국의 분노는 예루살렘에서 ‘위선’이라고 규탄 받았고, 동시에 많은 변명이 시도되었다(기독교 민병대들이 이스라엘의 통제지역 외부에서 침투했다는 등).

하지만 이러한 변명들은 너무나 많은 믿을 만한 목격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곧 사라졌다. 국제적인 분노는 엄청났다. 유엔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늘 그렇듯이 반대표를 던진 것을 제외하고는, 기권표 없이 147대2로 이 학살을 비난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미국,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엄청난 비난 여론이 일어났다 .. 〈130?133쪽〉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갖가지 끔찍한 ‘민간인 학살’ 하나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오랜 세월 말도 못하고 아픔만 삭여 왔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말문을 여는 사람이 있는데, ‘증언자’가 있어도 ‘증언을 뒷받침할 문서 자료가 있느냐’면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얼버무리거나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권력자가 있습니다.

.. 메시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국제적 불문율의 주요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만약 대량학살을 하고 싶다면 주변에 기자들이 없거나, 국내 기자들이 침묵의 미덕을 알고 있을 때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 〈134쪽〉

신문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릴까요. 방송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요. 참말로 우리들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고 듣는 이야기는 정작 우리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그저 ‘기자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취재해서 새 소식으로 내보낼 뿐’은 아닐까요.

.. 1967년 전쟁 직후부터,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주변국을 압박하는 정책을 펼쳐왔고 군사적 마찰도 끊이지 않았다. 이 결과 충분히 예견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동맹도 부랑자 국가들과만 맺게 되었으며, 그 유일한 옹호자인 미국에게 온갖 봉사를 다했다. 미국은 첨단기술을 이용한 무기를 사용해 남들이 개입을 꺼리는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진출해 군사적 발판을 마련하고, 그곳을 자국의 세력권 아래 두려고 한다. 과테말라 학살사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미국이 위험한 분쟁에 개입하려는 이유는 바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질적 경품(미국 국무성의 표현을 인용)’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다.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협력관계는 이스라엘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일부 대행하면서 성사되었으며, 미국은 인위적인 종속상태 아래에서 협력관계를 유지 한다 .. 〈232?233쪽〉

미국이 우리나라를 거의 식민지로 삼아서 주무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잘 모르는 어떤 ‘물질적 경품이라는 지하자원’이 남녘땅이나 북녘땅 어딘가에 묻혀 있기 때문일까요. 이런 지하자원은 따로 없어도 사회-경제-문화 틀거리를 미국에 매이게 하면, 미국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돈-힘-이름이 대단히 높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 게다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개입에 내재되어 있던 ‘소수 민족’ 탄압의 가치관은 자국의 실리를 위해 무력으로 다른 민족의 영토를 침범해 지배하고 있는 국가에 전반적으로 흡수되어 통치의 이론적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이스라엘은 언젠가는 군사적 패배를 맛보거나 어쩔 수 없이 핵무기로 적국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이전에 이스라엘은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인 내적 타락의 길에 접어들 것이다. 무력행사의 길을 선택한 1967년 이래 이스라엘은 그 길을 계속 걸어왔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하게 한 ‘지원자’는 이스라엘이 계속 그 길을 걷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이스라엘이 도덕적 해체의 길을 선택하고 궁극적인 타락에 다다르도록 부추기는 ‘지원자’인 셈이다 .. 〈233쪽〉

국방비를 늘리는 일, 무기로 나라를 지킨다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참말로 ‘주한미군’ 덕분에 나라를 튼튼히 지키고 있는가요. 휴전선에 수십만에 이르는 젊은이를 군대로 눌러 앉힌 덕분에 모두들 걱정 없이 잠들며 일할 수 있는가요.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이스라엘처럼 도덕이며 사회며 정치며 문화며 모두 ‘타락’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지. 겉으로는 나라살림이 세계 몇 위이고, 올림픽에서 몇 위까지 차지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라고 읊으나, 이런 숫자놀음을 걷어내고 속살을 보면 온통 곪아 있지 않을는지.

〈3〉 헌책방

제가 책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합서점〉 아주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골목길을 씁니다. 이 골목길은 청소부가 치울 수 있고, 이웃한 중앙고등학교 아이들이나 교사들이 치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골목길을 가장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쓸 테지요. 골목길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골목길에 쓰레기가 쌓이거나 떨어져 있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껍데기가 아닌 속알맹이로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헌책방을 찾아갈 줄 압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새책방-도서관 나들이’만 해서는 ‘자기가 바라는 모든 책’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스트셀러’ 축에 들지 못하면 새책방에서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알뜰히 인문학을 밝히고 우리 사회에 등불이 되는 책들이지만, ‘처세-돈벌이-시험공부-시간 때우기’ 책에 한참 밀려나서 찾아보기 어려운 책들이 있습니다. 그나마 도서관에서라도 이 책들을 알뜰히 사 주면 좋으련만,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지을 돈은 있어도 도서관에 갖출 책을 사들이는 돈이 없는 이 나라 아닙니까. 도서관에 컴퓨터 새로 들여놓을 돈은 있어도 책 몇 권 사들이는 돈이 없는 이 나라 아닙니까.

2001년 5월에 나온 《이유진-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라는 책을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동아일보사’라는 곳에서 나온 책이지만, 절판된 지 오래되었고 헌책방에서나 드문드문 찾아볼 뿐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모르는 영화인은 없겠지만, 이이가 쓴 자서전(1994년 민음사에서 《감독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나옴) 또한 새책방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문익환 목사님 책 가운데 몇 가지나 새책방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헌책방 아니고는 문익환 목사님 책을 손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나라 형편이 이렇습니다.

뭐, 문익환 님 책만 그럴까요. 송건호 님 책도, 성내운 님 책도, 박현채 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 책은 이제 ‘옛날 사람 책이니까, 더 안 봐도 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새로운 21세기,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꾸려 나가는 세상이니까, 새롭게 배워서 새롭게 이야기를 펼치는 사람들 책을 찾아서 읽는 편이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지요.

헌책방은 흘러간 옛 세월을 간직하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묵은 책은 더 돌아볼 값어치가 없다고 느끼니까, 오래된 책은 나이만큼이나 케케묵다고 미리 못을 박아 놓으니까, 자꾸자꾸 사라지는 책이 생기고 헌책방이라는 곳은 뒤로 밀려나거나 사라져야 할 곳으로 여기지 싶습니다.

정작 소중한 책이고, 훌륭한 책이며, 지금도 읽고 앞으로도 읽을 책이라면 ‘헌책방에서 살아남는 책’일 텐데, 헌책방을 애써 찾아와 보지 않으니, 어떤 책이 헌책방에서 살아남고 어떤 책이 헌책방에서 죽는지 못 느낍니다. 교보나 영풍에서 수십만 권 팔려나가는 책들이 헌책방에서도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정석 같은 교재는 참 오래도록 많이 팔립니다. 이런 책은 이런 책대로 이 나라 제도권 교육 틀거리에서 쓰임새가 있다고 느끼니 팔릴 테지요. 이런 책이 아닌, 그러니까 ‘처세-돈벌이-이름날리기’를 꿋꿋하게 거스르며 마음을 살찌우는 책들이 비로소 헌책방에서 살아남는 책, 헌책방에서 사랑받는 책입니다.

헌책방에 책을 팔아 보면 압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팔려고 자기 집에 있는 책을 추리다 보면 압니다. 자기가 읽은 책 가운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 가운데 헌책방에 내놓을 만한 책이 얼마나 되는가요. 자기가 손수 인터넷 헌책방을 연다고 칩시다. 이때 목록으로 올려놓아서 잘 팔 만한 책이 몇 가지나 있는가요. 헌책방 헌책이란 ‘몇 번이고 다시 읽힐 만한 값어치가 있는’ 책입니다. 새책방 새책은 ‘몇 번 읽히지 않아도 좋은’ 책, ‘한 번 읽히고 버려져도 그만인’ 책이기도 합니다.

새책방 새책은 굳이 여러 번 안 읽혀도 되는 책이기 때문에, 많이많이 빨리빨리 팔려야 ‘좋은 책’이라고 받아들여서 잘 보이는 자리에 늘어놓고 꽂아놓습니다. 하지만 헌책방 헌책은 ‘우리들이 손수 찾아보고 살펴보고 값을 헤아리며 골라내야 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큰 갈래로 나누어 놓아 꽂기’는 하지만 겹쳐 놓기도 하고 끈으로 묶어 차곡차곡 탑을 쌓기도 합니다.

스스로 찾아나서는 헌책방이요, 그냥 방구석에 틀어박혀 셈틀 자판만 또닥거려도 공짜로 보내 주는 새책방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우리 몸을 움직여서 땀 흘려 애쓰는 흐름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렇기에 헌책방이라는 곳도 구닥다리요 고리탑탑한 어두운 곳이요, 후미진 골목길에서나 죽을 동 살 동 하는 곳쯤으로 여기리라 봅니다. 우리는 참 오랜 세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참말 아무 생각 없이 짓밟고 내치고 깎아내리고 업신여기고 내쫓으며 살고 있습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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