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쏙 와닿는 책` 만들기 10년 내공
`눈에 쏙 와닿는 책` 만들기 10년 내공
  • 북데일리
  • 승인 2007.02.0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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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달인] ③디자인의 달인 - 북디자이너 민진기

※ `책의 달인`은 책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 중 우리시대 모범이 될 `장인`을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 편집자 주

[북데일리] 북디자이너 민진기(40)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가 디자인한 책들의 면면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태일평전> <젠틀 매드니스> <대담> <강의> <신영복의 엽서> <호모 코레아니쿠스>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책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특히 <젠틀 매드니스>의 경우 금박의 화려함과 검정 바탕이 조화를 이룬 중후한 표지로 일반 독자들에게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는 독자가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화려한 자태’ ‘책의 제왕 같은 위용’ ‘멋지다’는 찬사가 올라와 있다.

표지만으로 고객을 ‘현혹’하는 능력은 디자이너라고 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진기를 ‘디자인의 달인’이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는 이유다.

그가 주로 다루는 인문사회 분야의 서적은 자칫하면 무게감을 훼손시킬 수 있기에 실험적인 디자인을 펼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북디자인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세운 원칙인 ‘진화’와 ‘차별성’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적용해왔다. 때론 “이게 아니면 차라리 안 하겠다”고 버티면서까지 말이다.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이 대표적인 경우. 직접 고안한 글씨체로 인문서의 딱딱함을 지웠다. 출판사에서 마뜩잖아 했지만 고집을 피웠다.

“이거 아니면 하기 싫더라고요.”

물론, 흔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은 편집자들의 바람을 최대한 수렴하고 함께 의견을 공유한다. 해당 책에 대해 그들만큼 잘 알고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색다른 시도로 주목 받은 작품 중에는 <마더테레사 말씀>과 <전태일평전>이 있다. 1997년에 작업한 <마더테레사 말씀>은 당시엔 굉장히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저자.역자.출판사명을 표지 전면에 크게 배치했다. 형압(색을 입히지 않고 인쇄물을 눌러 오목.볼록함을 살리는 기법)으로 입체감을 준 <전태일평전>은 이후 유사한 표지가 여러 개 뒤따라 나왔다.

깊이 있는 내용의 책을 그 무게만큼 묵직하게 표현해내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작은 변신을 꾀해온 디자이너 민진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한국출판인회의(회장 김혜경) 주최 ‘2006 출판인의 밤’ 행사에서 ‘올해의 출판인’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1997년 프리랜서로 독립해 북디자인스튜디오 ‘민진기 디자인’을 운영한지 꼭 10년 만에 거둬들인 성과다.

“스스로에게 엄격할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클라이언트와 나누려고 할 만큼 자기 일을 사랑할 줄 아는 그는 분명 북디자인 계를 선도하는 몇 안 되는 프로 중 한 사람이다”

당시 주최 측이 발표한 선정이유는 북디자이너로서 민진기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그간 작업한 책만 대략 8백여 권. 어미가 자식을 가슴에 품듯 한권 한권을 머릿속에 새겨두고 있다. 그에게 북디자인은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밥질’이자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하나 하나가 다 애틋해요. 통과된 디자인도 사장된 시안도 전부 다.”

때로는 인문사회 분야에 국한된 작업영역이 아쉽다. 일본소설처럼 통통 튀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표지 디자인에 대한 욕심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전문성에 대한 자부심 역시 대단하다.

“특화된 이미지, 그만의 스타일 등 자기 전문 분야가 있다는 건 중요해요. 사실 제 디자인이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편은 아니에요. 되직하고 칙칙한 면이 많죠. 그게 책에 신뢰감을 더하는 데 효과적인 것 같아요.”

타이포그래피와 박(금, 은, 홀로그램 등) 장식은 민진기가 디자인에 있어 주력하는 부분들이다.

<강의>를 제작할 때는 책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저자인 신영복 교수(성공회대)를 찾아가 자필 서명을 받아왔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캘리그래피(손글씨)를 이미 2년 전에 도입한 것. 사무실 한 켠에 위치한 책상에서도 수 십장의 화선지와 서예용품이 눈에 들어왔다. 본인은 악필인 관계로 다른 직원이 쓴 붓글씨를 스캔받아 작업한단다.

박 장식은 인쇄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사용한다. 평면으로 인쇄된 종이에 질감이 다른 박을 가공함으로써 층을 만들 수 있다. 부각하고자 하는 부분이 도드라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북디자인이 단순히 표지 작업에서 그치는 건 아니다. 본문의 글씨체 및 배열 역시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숨결을 불어넣지 않은 구석이 없건만 정작 민진기는 자신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책이 내용이 좋아야 팔리지, 아무리 표지 디자인이 화려하고 좋아도 내용이 별로이면 팔리지 않습니다. 디자인은 책이 팔리는데 일조할 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겸양은 계속됐다.

“맘에 드는 디자인이 나오면 ‘운이 좋았다’고 말해요. 가장 보람된 순간이기도 하고요. 제가 재능이 넘치는 타입이 아니거든요. 만지고 만져서 결과물을 얻어내죠. 기한은 정해져 있는데 아이디어가 안 나올 때는 정말 울면서 작업합니다.(웃음)”

능력을 드러내기 보단 감추고,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북디자이너 민진기. 그는 속을 펼쳐 진득이 읽어봐야만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책과 닮았다. 별로 내세울 게 없다며 말을 아끼던 인터뷰 초반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북디자인계에 입문한지 10년.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길다는 그의 미래가 사뭇 궁금해진다.

[고아라 기자 rsum@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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