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도 비관도 그만, 묵묵한 삶의 가르침
낙관도 비관도 그만, 묵묵한 삶의 가르침
  • 북데일리
  • 승인 2007.02.0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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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얼마 전, TV의 모 회사의 음료광고를 보면서 위로를 느꼈다기보다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괜스레 예민해져 볼 때마다 채널을 돌렸던 적이 있습니다. 숙명론적 비관주의 역시 경계해야 하겠지만, 때때로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가혹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아픈 사람에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헛된 희망의 싹을 틔워내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결국 상황을, 사람을 더 깊은 좌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마는 경우를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늘 가능성을 염두에 둡니다.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혹은 과거에 했었던 일들에 대해서 그럴 수 있을, 그럴 수 있었을 가능성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얼마나 현실에 뿌리를 딛고 있느냐, ‘이상’이라는 풍선에 얼마나 공기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낙관과 비관이 갈리는 것이겠지요. 현재를 살기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도 안 되고, 풍선을 잡고 붕 떠올라도 안 되니 이것 참, 미묘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 앞에 올려놓는 소설은 <낙천주의자, 캉디드>(아테네. 2003)입니다. 이 소설 <낙천주의자, 캉디드>을 통해 ‘이 세상이 존재하는 세상 중 최고’라고 인식하는 라이프니쯔식 낙관론의 대표주자이자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스’와 ‘우릴 못 살게 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진 숙명론적 비관주의자 ‘마르탱’, 그리고, 파란만장한 주인공,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삶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3년 전 가을, 어떤 일로 구듭을 쳐 기진맥진해 들렀던 서점의 한 귀퉁이에서 발견했던 이 녀석, <낙천주의자, 캉디드>를 데려온 건 볼테르에 대한 예우였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저작을 남긴, 그 유명한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요?

둘 다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철학소설’이라는 단어가 머리칼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얕디얕은 상식의 선에서 ‘철학’과 ‘소설’이라는 단어가 선뜻 매치되지 않았습니다.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는 말이 퍼뜩 머릿속을 횡단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절 잡은 건 호기심과 무지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책장을 뒤적이다가 그만,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곤 ‘이 팡글로스가 저 팡글로스였구나!’라는 생각에 아! 했습니다. 사실, 논제의 짧은 한 제시문을 통해서 접한 `팡글로스 밸류(가장 낙관적으로 부풀려진 수치)`. 바로 그 의미에 대해서만 샤샥 훑고 지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제 무지가 조금은 희석된 듯한 느낌도 들고 그래서, 옥석을 발견한 것처럼 기꺼워 냉큼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인문철학서에서 느낄 수 없는 부드러운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참 신선했던 소설이었습니다. 볼테르의 철학소설 <낙천주의자, 캉디드>는 1759년에 쓰여진 작품임을 감안하고 봐야 무리가 없습니다. 계몽소설이라 하품 나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분량도 적고 가독성이 좋아 동화나 우화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읽다보면, 내용 자체가 극단적인 부분들이 꽤 있고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지만 볼테르가 ‘계몽’의 시대를 살았고, 누구보다도 앞서 행동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신다면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무척 계몽적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농원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250p)

사실, 우리는 굳이 이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와 숙명론적 비관주의,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근거 없는 낙관주의나 숙명론적 비관주의는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 혹은 어차피 해봐야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변화를 꾀하려 들지 않는다는 고약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볼테르가 경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반성도 노력도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깨달음을 얻은 캉디드처럼, 자신의 삶을 농원을 가꾸듯 묵묵히 개척해나가는 삶을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함께 밭 갈러 가실 분~!”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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