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농부보다 덜 창피하잖아?
시인은 농부보다 덜 창피하잖아?
  • 북데일리
  • 승인 2007.02.0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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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그끄제 시골집에 와서 오늘로 나흘째. 나흘 동안 시골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시골집으로 오는 길에 택배기사와 전화로 이야기 나누었을 때를 빼고는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얼굴 마주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딱히 연락해 올 사람이 없고, 저도 굳이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낼 테지요. 오늘은 책 <포도밭 편지>(예담. 2006)와 함께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볼 까 합니다.

.. 체험농장의 포도나무들이 획일적으로 똑같은 모양을 하고서 같은 방법으로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으면 아이들의 상상력도 그만큼 좁아지게 된다. 아버지는 그것을 이미 30여 년 전부터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포도나무를 야생의 숲처럼 자연스럽게 가꾸면 아버지 당신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풍부한 상상력을 심어 주리라는 것을 .. 〈161쪽〉

그제는 밥할 물을 길러 윗마을에 올라갔다 왔습니다. 윗마을 개는 강아지일 때부터 봐 왔건만 제가 물을 다 긷고 내려갈 때까지 거칠게 짖어댑니다. 못 올 사람이 왔다고 느끼는지, 아니면 반갑다고 짖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쓰는 물은 다 얼어붙어서 언제 녹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올겨울에는 두 번이나 녹은 적 있습니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서인데, 두 번째로 녹고 다시 얼어붙은 뒤로는 아직 안 녹네요. 아마 봄까지는 이렇게 될 듯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겨울이잖아요.

.. 포도나무가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보고 농부의 게으름을 탓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획일적이려면 개성을 억눌러야 한다. 억누르면 그만큼 자연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포도나무에 스트레스가 많으면 포도 맛이 시어진다. 스트레스 없이 자란 포도가 빛깔과 향기가 좋고 맛도 훨씬 달다 .. 〈133쪽〉

다음주쯤 다시 서울 나들이를 할까, 다다음주쯤 서울 나들이를 할까 헤아려 보고 있습니다. 국도에서 차에 치여 죽은 짐승들을 찾아다니며 영화를 찍었다는 분 작품이 1월 30일에 선보인답니다(영화이름은 〈어느 날 그 길에서〉, 보여주는 곳은 광화문 일민미술관 5층 영상미디어센트 미디액트 대강의실. 저녁 19시 30분). 그때 가 볼까 싶기는 한데, 시골에서는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는 자리가 없어 퍽 고달픕니다. 뭐, 시골에는 도서관도 없고 변변한 책방조차 없으니까요.

하지만 시골에 영화 볼 곳이 없고 책 볼 곳이 없다고 해서 메마르거나 팍팍한 삶터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극장과 책방이 없어도 논과 밭이 있고 산과 내가 있으니까요. 차소리 적거나 없고 멧새소리를 반갑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달과 별도 가득가득 올려다볼 수 있고, 밤마다 느끼는 달빛도 참 좋아요. 다만, 요새는 시골마다 흐르던 조그마한 도랑을 다 시멘트로 발라내어 가재도 사라지고 도랑물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도랑에서 노는 아이 또한 없어요. 어쩌면 도랑에서 놀 아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없이 시멘트로 물골을 새로 트는지 모릅니다.

.. 아버지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온힘을 다해서 이주한 땅을 개간했으나 이 땅도 얼마 못 가 다른 사람 명의로 넘어가 버렸다. 착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개간비도 못 받고, 아버지 소유의 포도나무까지 다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 주고서야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었다 .. 〈31쪽〉

즈음 시골 읍내나 면내, 또는 살림집 모여 있는 마을 다리께나 네거리께에는 노란 깃발이 펄럭입니다(도시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깃발이 없는 곳도 있지만, 깃발에는 모두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한미 FTA 저지” 또는 “한미 FTA 반대”. 한미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것을 맺으면, 도시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고 하듯이 ‘한국 농촌은 싸그리 무너집’니다. 하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고 있는 지금이라고 더 낫지 않아요. 벌써 여러 열 해 동안 시골사람들은 도무지 사람답게 살 수 없을 만큼 형편이 나빠졌거든요. 시골에서 살 만하다면 왜 도시로 떠날까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넉넉하게 살림을 꾸릴 수 있다면 왜 농사짓기를 그만둘까요. 스스로 농사꾼이 되겠다고 하는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있나요. 도시에서 그럭저럭 돈벌며 살다가 시골에 땅 사고 집 사고 ‘귀농’한다는 사람은 있어도, 부모 일을 이어받아 농사꾼이 되려는 이도, 스스로 처음부터 소작농부터 해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몇 사람 있을 뿐입니다. 이런 문제는 무슨 협정을 맺고 안 맺고하고는 거의 인연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얼거리가 이렇게 뒤틀려 있으니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명절때와 김장철에만 곡식과 채소와 열매 값이 조금 오릅니다. 그러나 그런 때가 지난 뒤에는 어떻지요? 스무 해 앞선 때하고 지금하고 곡식 값이 얼마나 달라졌는가요. 그동안 물건값이 얼만큼 올랐고, 배며 능금이며 귤이며 무며 배추며 감자며, 값이 어떻게 되어 있나요. 적어도 1997년에는 도시 저잣거리에서 애호박 하나 값하고 전철삯하고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애호박 하나 값과 전철삯은 얼마나 벌어졌나요. 더욱이 애호박 값이라 해도 도소매상을 거쳐 우리들이 저잣거리에서 사는 값이지, 농사꾼들이 받는 값이 아닙니다.

.. 직업란에는 ‘농업’이라고도 써 넣었다. 그러자 딸내미가 “아빠, 창피해! 아빠 직업을 농업이라고 쓰지 말아요” 하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농업이란 글씨를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지웠다. “그럼 여기다 뭘 써 넣어야 하니?” 하고 내가 묻자, 바로 “시인, 시인은 농부보다 덜 창피하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65쪽〉

저는 시골에 살지만 농사는 안 짓습니다. 농사지을 땅도 없지만 농사짓는 재주도 없고, 다른 할일이 있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농사짓는 분들은 늘 옆에서 지켜보고 농사꾼들 이야기도 늘 듣습니다. 뭐, 시골에서 시골사람들 이야기 말고 무슨 이야기를 듣겠어요.

아무튼. 시골에서 지내면서 주소를 바꾸고 무슨 서류를 떼고 하면서 ‘직업’ 적는 자리를 보노라면, 어디에서든 ‘농사꾼’이나 ‘고기잡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농사꾼이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는 분들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피라도 뽑을라치면, 딱히 동그라미 그릴 자리가 없어서 ‘무직’이나 ‘기타’나 ‘자유업’ 따위에 동그라미를 그려야 합니다. 적어도 ‘농수산업’이라는 직업 칸도 하나 마련해 놓아야지 싶은데. 어쩌면, 이 나라에는 농수산업에 몸바쳐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미자유무역협정 따위도 함부로 맺는지 모릅니다.

.. 포도농사를 짓는 내가 보기에 제일 미운 사람은 껍질은 버리고 알맹이만 쏙 빼먹는 사람이다. 나는 포도를 맛있게 먹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포도를 팔고 싶지 않다. 내 포도밭에 와서 알만 쏙 빼먹고 껍질을 밭에 버리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것은 포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포도를 대단히 무시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지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 〈92쪽〉

저는 바깥밥을 사먹을 때곤, 누구네 집에 놀러가서 밥 한 그릇 얻어먹을 때곤, 밥그릇을 깨끗이 비웁니다. 차려 놓은 반찬도 되도록 남김없이 먹습니다. 어릴 적부터 밥버릇을 그렇게 들였거든요. 바깥밥을 사먹거나 술안주를 먹다가 남으면, 가방에 미리 챙겨놓고 있는 반찬통이나 비닐봉지에 고이 담아서 집으로 가져갑니다. 찌개나 비빔밥을 먹을 때 함께 넣고 먹습니다.

서른세 해 살아오며 몸에 밴 이런 밥버릇을 따로 돌아보지는 않았어요. 으레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농사꾼들이 당신들 삶을 돌아보며 적바림한 글을 몇 꼭지 읽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나 아버지나 농사꾼 딸아들입니다.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저한테 가르친 밥버릇이란 농사꾼 밥버릇일 테지요. 밥알 하나도 소중히 여기라는 밥버릇, 반찬 한 점도 고맙게 여기라는 밥버릇, 그런 밥버릇이었을 테지요.

요새는 농약이다 뭐다 하고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능금 한 알, 배 한 알 먹을 때에도 껍질을 두껍게 잘라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소맷부리나 수건으로 쓱쓱 먼지만 닦아낸 뒤 껍질째 다 먹습니다. 농약이 묻었다면 껍질에만 묻겠어요. 속알까지 배어들지. 껍질에 농약성분이 더 많다고 하는데, 껍질을 안 먹어도 도심지 자동차 배기가스 마시는 일을 생각하면 쌤쌤입니다. 정수기 물을 마시고 먹는샘물 사마신다고 더 깨끗한 물일까요.

.. 메뉴판을 펼쳤다.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커피 한 잔에 1만 5000원. 맥주 한 병도 1만 5000원이었다. 순간 나는 빠르게 셈을 했다. 포도가 얼마인가. 한 송이에 1000원이다. 도매시장에서는 500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포도 열다섯 송이와 커피 한 잔 값이……. 아내도 입이 딱 벌어져 있었다. 잠시 열애 분위기에 젖어 있던 우리 부부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 윤시내의 열애를 들으며 마시는 커피는 왜 이렇게 비싼 걸까? … 다방에 있느냐, 카페에 있느냐에 따라서 커피 값을 달리하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갤러리에 있으면 예술작품이 되는 것처럼 커피 한 잔을 고급 카페에서 마시면 문화가 되는 것이다 .. 〈156쪽〉

요즘은 새벽 두어 시까지 글을 씁니다. 깊은 새벽에 일을 마치고 불을 끄면 창밖이 환하게 느껴집니다. 요 며칠 내린 눈 덕분에, 또 반달이 된 달빛으로. 며칠 더 있으면 보름달이 되어 더 환해질 테지요. 그때까지 눈이 안 녹고 있으면 훨씬 환할 테고요.

곰곰이 생각하니, 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짐승들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저 같은 사람보다 도시사람들이 애써 찾아가서 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저야 늘 보는 주검이고 늘 안타까이 생각하는 주검이니까요. 그런데 도시 사람들이 이런 영화가 하는 줄이나 알는지. 또, 이런 영화가 한다고 할 때 몸소 찾아가서 보려고 할는지. 이 영화를 본다 한들 무엇을 느끼고 자기 삶을 조금이나마 바꾸어 보려고 애쓰기나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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