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한 즐거움 주지만 덮으니 아쉬운 책
수수한 즐거움 주지만 덮으니 아쉬운 책
  • 북데일리
  • 승인 2007.01.2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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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지난 한 주, 자전거를 타고 충주부터 부산까지 달렸습니다. 부산으로 가는 길에 틈틈이 우체국에 들러 엽서를 한두 장 산 다음, 아는 분들한테 먼 곳 소식을 띄웠습니다. 상주에서 한 통, 대구에서 두 통, 부산에서 한 통 띄웠습니다. 피시방에 들러 인터넷에 들어가 또각또각 자판을 두드리면 몇 초 만에 편지가 가기는 하지만, 지역 우체국 도장이 쿵 찍힌 엽서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곳에 발을 내디뎠다는 자취를 남기고도 싶고, 제가 다니면서 부대낀 여러 가지를 엽서 한 장에 담아 함께 나누고도 싶었거든요. 편지쓰기는 소식을 알리는 구실을 하는 한편, 저마다 다른 삶터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담습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한달까요.

사람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이 세상에서 사람 냄새를 느끼기 참 어렵습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자기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물결을 사람으로 느끼는 이는 아주 드문 듯합니다. 피붙이나 고향동무를 애틋하게 그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일터식구들한테 마음쓰는 분은 또 얼마나 되지요? 입으로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뇌까리지만, 정작 우리들 움직이는 몸놀림을 보면, 이웃사람한테는 조금도 마음을 안 쓰고 자기만 잘되고 잘살기를 바라지 싶어요.

이야기책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현암사. 2006)는 이제 막 익힌 ‘글’을 어떻게 몸에 익히면 좋을지를, 또 내 둘레에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가를 가만히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글을 배우고 셈을 배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학교에서 동무들과 어울려야 하며 여러 가지 과목을 배워야 할까요. 아이들한테 한자며 영어며 마구 가르치려 하는 사람은 많아도 ‘아이들 스스로 왜 배워야 하나’를 느끼도록 먼저 길잡이 노릇을 하는 부모나 교사는 거의 안 보입니다. 또한, 부모나 교사 스스로도 ‘아이들한테 무언가를 가르치는 까닭과 보람’을 못 느끼지 싶어요.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에 나오는 아기곰 뿌뿌는 어느 날 길에서 가방 하나를 주웠고, 이 가방 임자를 찾아 주면서 토끼 할머니를 알게 됩니다. 아직 자기 집 둘레 작은 삶터만 아는 아기곰이었는데, 퍽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할머니를 알게 되고 편지를 받으면서 세상 보는 눈을 넓히고, 맞춤법도 엉망이었던 자기 글도 차츰 가다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할머니한테 보내는 편지에 담을 이야기를 둘레에서 얻습니다. 그동안 대충 스치고 지나쳤을 법한 일들, 동무들과 어울리는 삶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돌아봅니다. 이리하여 이웃을 걱정하는 마음, 아끼는 생각, 사랑하는 마음결도 하루하루 자라납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으로 이어지는, 그러니까 마음을 열고 나눈 편지 한 통이 아기곰한테 우리 세상이 살기 좋은 곳임을 깨닫게 한달까요. 아기곰은 아직 깊이 느끼지는 못할 테지만.

글쓰기든 편지쓰기든 일기쓰기든, 너무 억지로 시키는 부모와 교사가 많은 우리 형편에서,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는 아이들한테 참말 있어야 하는 것, 아이들이 세상을 즐기면서 부대끼는 길을 어떻게 추스르면 좋은가를 나긋나긋 들려줍니다. 조용히 보여줍니다.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꾸밈없이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서로 어우러지는 재미난 세상을 깨닫도록 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책에는 여러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먼저, 남자와 여자 성구실을 틀에 박히게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데기로, 아버지는 바깥에서 회사 다니며 돈 벌고 궂은 일을 도맡는(이야기 끝에는 수해복구 지원에 나서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일본에서 이 동화를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 짜임새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성구실을 잘못 받아들이도록 할 걱정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맞춤법을 엉망으로 쓰다가 올바르게 맞추게 된 다음에 쓴 편지에서 ‘틀린 맞춤법’으로 나오는 대목(34쪽, 56쪽을 보면,‘-예요’로 써야 하는데 ‘-에요’로 잘못 씀. 63쪽에서는 바르게 나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볼 아이들(예닐곱 살?초등학교 1ㆍ2학년) 눈높이를 헤아렸을 때 어울리지 않는 얄궂은 말과 말투가 많이 보입니다. 몇 가지를 들어 봅니다.

- 감사(→고마움), 다행이구나(→잘 되었구나), 점점(→차츰), 간신히(→가까스로,겨우), 비하면(→견주면, 대면), 생각 중이었단다(→생각하고 있었단다), 당근 쿠키(→당근 과자), 그로부터(→그 뒤로), 할머니로부터(→할머니한테) 한 달만의 소식(→한 달 만에 온 소식), 할머니의 편지를(→할머니한테 편지를), 방망이질하기 시작했습니다(→방망이질을 합니다), 무사하단다(→괜찮단다,걱정없단다), 급히(→바삐,서둘러), 순순히(→얌전히,곱게), 식사(→밥), 정중하게(→다소곳하게), 계속(→꾸준히), 직접(→손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아쉽습니다. 이만한 줄거리를 담은 이야기책이라면, 굳이 나라밖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보다는 나라 안에서 창작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나라 안에서 힘쓰는 어린이책 작가한테 이런 괜찮은 이야기책이 나라밖에 있음을 이야기한 다음, 우리 형편에 맞고 우리들 이야기에 어울리는 한편 이 나라 아이들이 좀 더 재미나고 살갑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 지어내는 거지요. 그렇게 창작 동화가한테 기운을 북돋우고 좋은 이야깃감을 알려준 뒤, 더 즐겁게 우리 아이들이 즐길 작품을 빚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본 아이들만 즐길 만한 작품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즐겨도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으로 번역을 해서 펴낸 책입니다. 그렇지만 책을 덮는 마음은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 나라 창작 동화가들 눈높이와 글솜씨로는 이만한 책조차 스스로 빚어내지 못하는가 싶어서요. 그리고, 책을 펼치기 매우 안 좋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보면서 책이 다치지 않도록 양장으로 묶었다고 하겠지만, 어른이 보아도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한편, 종이결이 날카로와 손이 긁히기도 하며, 가운데가 잘 접히지 않고, 가운데를 접으려고 누르면 책이 북 하고 부서집니다. 펼쳐서 넘기기 힘들도록 되어 있는 제본 말썽을 아직도 풀지 못하는가요? 좀더 부드러운 종이로, 또한 가벼운 책으로, 그리고 ‘아이들이 보다가 책이 좀 망가지더라’도 단출한 꾸밈새로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작품성으로는 별 넷을, 책 완성도로는 별 하나 반을 주겠습니다(별 다섯이 만점이라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고, 소개하고 싶지도 않지만, 잡지 ‘북새통’에서 다달이 ‘이달의 좋은 책 후보 다섯 권’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내키지는 않는 책이지만, 저로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는 좋은 대목과 아쉬운 대목을 남김없이 들려주면서 이 나라 어린이책 문화를 가만히 돌아보고 싶습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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