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박찬욱이 좋아했다는 보네거트 읽기
하루키, 박찬욱이 좋아했다는 보네거트 읽기
  • 북데일리
  • 승인 2007.01.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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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여든을 넘어서도 변함없이 소중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메타픽션과 공상과학과 블랙유머, 그리고 패러디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기운 넘치는 할아버지, ‘커트 보네거트’가 바로 그입니다.

보네거트는 미국인이면서도, 아니 미국인이라서일까요?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조롱하는데 능통해 있습니다. 그는 미국시민자유조합(ACLU)에 속해 있으면서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라는 행정부의 시민자유권 침해를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에 의하면, 부시는 ‘역사가 뭔지도 모르는 대통령’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실탄을 사용해 진짜로 벌이는 전쟁놀이, 공화당 슈퍼볼 게임을 일삼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적어도 보네거트와 저는 ‘전쟁과 부시를 싫어 한다’는 엄청난 공통점을 가지게 된 셈이니 이것 참, 시작부터 높은 씽크로율에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에 보네거트의 책 네 권을 모두 지니게 된 사건의 전모는 이렇습니다. SF를 좋아하는 친구에게서 커트 보네거트의 이야기를 조금 들은 적이 있었으나 그 친구, 워낙 난해함을 추구하는 편이라서 듣고서도 한귀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나 또 한 지인의 타액을 동반한 열렬한 추천으로 뭐, 언젠가는 보네거트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마음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촘스키 할아버지에 관한 책들을 주욱 읽어 내리다가, 열대에서 단련되어 불지옥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인터뷰어 데이비드 바사미언과 촘스키와의 인터뷰가 들어있다는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시대의창. 2006)를 접하게 되었고, 거기에 실린 보네거트의 인터뷰를 읽고 홀딱 반한 저는 결국, 한국에 나온 보네거트의 소설을 구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알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도 박찬욱 감독도 매우 좋아하고 영향을 받았던 작가라고 합니다. 네, 사실 전모랄 것도 없지만, 대강 이러합니다.

올해 여든 다섯이 된 커트 보네거트 소설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합리적 이유는 없고 잦은 런던 공격에 대한 보복성의 상징적 의미만 가지고 있었던 1944년의 잔혹한 ‘드레스덴 폭격’에서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 3,900여 톤에 해당하는 폭탄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13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민간인이었다고 합니다. 히로시마 핵 투하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드레스덴의 희생자가 더 많은 숫자라고 하니 당혹감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접한 보네거트의 소설은 <제5도살장>(아이필드. 2005)였습니다. 이 소설은 드레스덴에서의 참변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그가 24년 만에 내놓은 ‘기억과 응시, 그리고 고백’입니다. 가벼운 문체 속에서도 이 소설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그를 힘들게 했을 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 엄청난 사실에 대해 ‘외면’도 했고 ‘부정’도 해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기억과 응시’입니다. 그는 실제로 성서를 인용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될 때 뒤를 돌아봐 소금기둥이 된 롯의 부인과 같은 운명이라 할지라도 비껴가지 않고 직시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네거트의 소설은 포스트모던 계열에 해당합니다. 작가의 체험을 소설화한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효과적으로 비판하여 현실을 의미있는 영역으로 재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메타픽션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5도살장>의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의 참전 내용은 보네거트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빌리는 악당이 등장하는 소설은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악인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하며, 선한 인간본성에 대한 믿음과 인류애를 느끼게 합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를 넘나드는 전보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짧고 경쾌한 단문들을 읽어내리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넓은데다가, 어수선한 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미처 직소퍼즐 같은 형태를 짜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20-30페이지 정도를 넘기면서야 아, 하면서 어렴풋이 감이 왔고, 앞부분을 다시 뒤적이며 맞추는 재미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분열증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는 참상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이미 병들어버린 현실에 대한 잔혹한 냉소, 선량한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 그를 통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짹짹?

작품에 나타난 그의 시간관도 독특합니다. 보르헤스의 불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을 지 안 받았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시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도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트랄파마도르 행성의 트랄파마도리안의 시간관으로, 모든 순간은 영원하며, 필요하면 어떤 순간이라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죽음도 죽는 바로 그 순간에는 나쁜 상태지만 다른 많은 순간들에는 아주 양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가는 거지(so it goes)”라고 말하며 어깨를 한 번 들썩일 뿐입니다.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31p)

‘마크 트웨인 이후 가장 웃기는 미국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는 커트 보네거트는 단순히 유쾌함만을 주는 작가가 아닙니다. 또, SF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 메시지는 대단히 양심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시종일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의 소설 안의 캐릭터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인물은 보네거트 자신의 투사물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제5도살장>, <타임퀘이크>, <갈라파고스> 등에서 작가로 등장합니다. 성격이나 생활하는 모습 등은 작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환상적인 과학소설을 쓰는 것이 최대 목표인 인물입니다. 트랄파마도르 행성인인 트랄파마도리안 역시 <제5도살장>외에 <타이탄의 사이렌>에 등장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타이탄의 사이렌>은 현재 절판이라 구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출간된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은 네 권 있습니다. 아이필드에서 나온 <제5도살장>,<고양이요람>,<타임퀘이크>,<갈라파고스>가 다입니다. 1980년대 이후 꾸준히 번역이 되어 나왔지만 어느 것 하나, 초판을 넘긴 것이 없다고 하는 보네거트의 책. 이제는 SF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고도 오래도록 양지로 나와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길 바랍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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