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서 버리는 책은 어디로 갈까
도서관서 버리는 책은 어디로 갈까
  • 북데일리
  • 승인 2007.01.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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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굴다리 헌책방〉 / 02-706-2338

<1〉 어디로 가면 좋을까, 서울에서

서울에 온 지 여러 날째. 오늘은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놓고 한참 생각합니다. 글쎄, 어디가 나을라나. 그동안 제대로 못 간 곳, 좀 먼 데까지 나가 볼까? 그렇다면 어디쯤? 늘 다니는 곳만 다니는 듯해서 헌책방 보는 눈길도 스스로 좁히고 있지 싶은데.

하지만 딱히 어디를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달립니다. 무악재를 넘고 독립문을 지나고 충정로를 지날 무렵, ‘그래, 공덕동 쪽으로 가 볼까? 〈굴다리 헌책방〉도 지난해에 한 번 가고 아직 못 갔잖아?’ 하고 생각합니다. 한 해에 한 번 겨우 찾아가는 헌책방이라. 이 헌책방한테도 참 미안한 일입니다. 그래도 철따라 한 번씩 찾아가서 인사라도 해야 책방 아저씨가 얼굴을 안 잊어버리실 텐데…….

<2〉 어디서 왔어요?

짐수레 붙인 자전거를 끌고 공덕동으로 옵니다. 고가도로 하나가 사라져서 길을 좀 헤맨 끝에 ‘갈매기살 고기집’이 죽 늘어선 골목을 찾아냅니다. 장사하는 집하고 상관없는 빈 벽 한쪽에 짐수레를 붙이고 자전거 앞바퀴를 뗍니다. 이제 슬슬 ‘저녁 고기 장사’를 준비하는 이웃 갈매기살 고기집 분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제 자전거를 구경합니다. “어디서 왔어요?” 하고 묻는 분도 있습니다. 자전거야 흔히 보지만, 자전거 뒤에 짐수레 붙인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고, 고기집 골목에 와서 헌책방에 들어가니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느끼시는 듯.

“자전거 참 희한하네.” 앞바퀴 떼어서 책방 문가에 세워 놓으니 어느 아저씨가 한 마디. “충주에서 왔다고? 몇 시간이나 걸려?” 여덟 시간쯤 걸린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곤 〈굴다리 헌책방〉을 중심으로 이웃 고기집 사진도 함께 찍습니다. 여태껏 이곳을 찾아오며 사진을 찍을 때는 ‘뭔 놈이 사진기 들고 깝죽거리느냐?’는 분위기를 느끼며 어설피 찍었지만, 오늘은 자전거에 붙은 짐수레 덕분에 ‘재미난 일을 하는 양반’ 소리를 들으며 홀가분하게 여러 가지 모습을 자유로이 찍습니다. 제 사진기 눈에 들어온 고기집 일꾼 얼굴도 ‘뭔 놈이냐?’ 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책방 앞에서 사진을 열 몇 장 찍은 뒤 안으로 들어갑니다. 〈굴다리〉 아저씨한테 꾸벅 인사를 합니다. 여덟 달 만에 찾아왔으나 얼굴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안쪽에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자리가 훤히 트였습니다. 안쪽에 가득 쌓였던 책이 책탑 두 줄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한꺼번에 처분하셨나 봐요?”, “자리만 차지하니까 치웠지.”

그동안 책더미에 묻혀 볼 수 없던 뒤쪽 책도 하나하나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헌책방에 책이 쌓일 때는 ‘그다지 찾아서 읽어 볼 만하지 않은 책’인 탓에 쌓이기도 하겠지만, ‘저마다 읽고 찾을 만한 값어치가 있을 온갖 책을 두루 찾는 사람이 없’는 탓에 쌓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굴다리 헌책방〉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한꺼번에 어디론가 자리를 옮긴 책들은 무슨 이야기를 안고 그 긴 세월을 이어왔을까요.

<박남준-나비가 날아간 자리>(광개토. 2001)라는 책이 보입니다. 시인 박남준 님 책으로는 <마음 하나 굴러간다>라는 산문모음을 한 번 읽은 적 있습니다. 정작 이분 시모음은 읽은 적이 없고 산문모음만 읽었습니다.

.. 한 접이면 백 개. 적어도 두 접은 따서 깎아야 이 집 저 집 맛이나 보라고 나눠 드릴 텐데, 겨우 반 접도 안 되는 것을 따다 보니 고개가 아프다. 그래, 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감을 따다가 잘못 떨어져서 깨진 것들은 며칠 전에 깨끗이 씻어 비워 놓았던 식초항아리에 넣는다. 이 항아리들이 채워지고 식초가 익어가겠지. 어서어서 때가 되어 맛있는 감식초가 익어 가면 그래, 고마운 이들에게 작지만 나눠 줄 것이 생기겠구나. 겨우 감 몇 개를 텅 빈 항아리에 집어넣으면서도 괜히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래, 무엇인가 나눌 것이 있다는 것,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아직 내게 가진 것들이 있어서 나눌 것을 나눠 주며 그런 마음을 잃지 않게 해 주시는 모든, 그 모든 세상의 생명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 〈39쪽〉

마흔 중반에 다다른 나이에 산골짜기로 들어가 혼자 살아간다는 박남준 님. 당신은 산골짜기에서 무슨 재미를 느낄까요?

.. 문을 열고 나가 하늘을 올려보다 방문을 바라보니 흠흠 흰 한지 문에 담겨 비치는 붉고 노란 나뭇잎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들어와 아랫목에 눕는다.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야.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 〈45쪽〉

충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충주로, 그다지 길지 않은 길이지만 짐수레 자전거로는 머나먼 이 길을 달리며 늘 하는 생각 하나, ‘뭐, 내 힘이 자라는 만큼 이렇게 살아야지’. 아직은 이 길을 달릴 수 있으니까, 아직은 이렇게 세상을 살 수 있으니까. 또 나중 이렇게 살기 어려운 때가 되어도 지금처럼 고이 이어갈 수 있고, 그때는 또 그때대로 또 다른 삶을 찾아서 그 나름대로 꾸려갈 수도 있고.

<함성주-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월간 말. 2004)라는 책이 보입니다. 예전에 헌책방에서 한 번 스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안 사고 그냥 조금 넘겨 보다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한 번 사 놓고 찬찬히 읽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조선시대까지 힘들여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제 어머니만 보아도, 눈 뜨자마자 방에서 밥상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가셔서 저녁에 요강 들고 밥상문으로 들어와 고단한 몸을 뉘셨으니 크게 과장된 말씀도 아니더군요. 더구나 예전엔 남녀 간에 유별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자가 안방문으로 출입하는 것은 예절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하니, 집안일과 농사일로 고단하기 이를 데 없을 여자들을 좀더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가 없었던 할아버지들이 원망스럽고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 〈28쪽〉

저는 사상이나 철학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는 책을 잘 안 봅니다. 더러 보기는 합니다만, 이제는 굳이 안 찾습니다. 사상이나 철학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절로 나오기 마련이고, 삶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사상이나 철학이란 껍데기에 지나지 않다고 느껴서입니다. 우리들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며 부대끼는 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사상이나 철학은 살며시 묻어나온다고 느낍니다. 함성주 님이 당신이 태어나 살았던 섬마을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돌아보고 되새기며 적는 이 조촐한 책에서 깊은 사상과 철학을 느끼고 배웁니다.

<제임스 A.미치너/송길복 옮김-아! 폴란드>(토담. 1985)라는 책이 보입니다. ‘폴란드’라, 폴란드라는 나라이름을 떡하니 앞세운 소설이라. 이 책도 한 번 읽어 볼까?

<한국 노동운동 탄압백서>(이웃. 1991)는 1990년 1월부터 1991년 7월까지, 이 나라 정부가 얼마나 노동운동을 짓밟고 깨부수느라 애썼는가를 찬찬히 살피며 자료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즘은 이런 책 찾아서 읽는 사람 없겠지요. 이런 책 펴내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 그래서 헌책방에서도 차츰 자취를 감춥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헌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이런 책은 씨가 말라 버리지 싶어요. 이런 책이 씨가 마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책만 씨가 마르지 않고, 지난날 이루어진 온갖 끔찍한 짓밟힘과 괴롭힘과 들볶음조차 잊혀져 버리는구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일러-진정한 노동조합 운동>(만민사. 1989)은 필리핀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한 사람이 필리핀이라는 사회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책이라 합니다. 필리핀사람들 이야기가 이렇게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니, 퍽 놀랍네요.

<현장수첩기획실 엮음-노동해방을 여는 책>(이웃. 1989)도 보입니다. 이 땅 노동자들이 가까이하면 좋을 교양도서목록과 학습도서목록을 차근차근 소개하는 책인데, 앞머리에는 ‘노동자가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 ‘책에서 얻는 교양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교양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사람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무슨 일이든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질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학식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아예 교양과는 거리가 먼 인간인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어떤 노동자들은 자신이 교양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옷이나 말씨, 행동거지 등을 ‘고상하게’ 꾸미려는 사람도 있다. 또는, 보지도 않으면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마치 학생인 양 꾸미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렇듯 외모로 보여지는 꾸민 교양보다는 속에서 우러나오고, 스스로도 부단한 노력에 의해 교양을 쌓아가는 것만큼 훌륭한 것은 없을 것이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항상 자신의 교양을 드높이려는 노력, 이러한 것이 진정한 교양이다. 결코 남에게 기생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꾸려가는 건강한 모습을 지닌 노동자야말로 다른 모든 인간집단의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3쪽〉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산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저러나, 오늘은 어쩐지 ‘이런’ 책만 자꾸 손에 집히는군요. 뭐, 어떻습니까. ‘이런’ 책을 구경하는 날도 있고 ‘저런’ 책을 구경하는 날도 있으니까요. 어떤 책을 구경하든 제 마음을 깊은 데까지 건드리며 울릴 수 있는 책을 보면 됩니다. 제 모자람을 일깨우고 제 아쉬움을 깨우치며 제 섣부름을 나무라고 제 어리석음을 다스려 주는 책을 보면 됩니다. 처음 마주하는 책이든, 글쓴이나 출판사가 낯선 곳이든 아니든 가릴 까닭 없습니다. 저한테 즐거울 책, 제게 기쁨과 보람을 선사할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기꺼이 가까이하면서 좋고 나쁜 대목을 제 두 눈으로 헤아리고 살피며 곰삭이면 된다고 느낍니다.

(Boardman press,1982)는 ‘보스맨 목사님이 1987년 11월 2일에 기증’했다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수도침례신학교도서관’ 장서였군요. 장서 도장에는 “책 속에서 보람을! 깨끗이 사용합시다!”라는 글도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2002년 5월 19일 폐기’라는 붉은 도장도 함께 찍혀 있습니다. 아, 왜 ‘폐기’해야 하는 책일지? 낡아서? 오래되어서? 고침판이 나와서? 보드맨 목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폐기’하기로 한 책은, 이제는 ‘읽을 값’이 없어진 책일까요?

〈3〉 취재 전화

한참 〈굴다리 헌책방〉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전화 한 통 걸려 옵니다. ㄱ방송이라고 합니다.

“굳이 헌책방을 가는 까닭이 있나요?”

또 그 물음인가 싶었지만 꾹 참고, “교보문고는 책을 사는 곳이라 한다면, 헌책방은 책을 보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보문고에는 팔리는 책을 두고 안 팔리면 반품하잖아요. 잘 팔리는 책은 잔뜩 쌓아 놓고 그것만 중심으로 팔고요. 알고 보면 다른 책은 장식입니다. 그냥 책 많이 갖추고 있다고 겉멋으로 보여주는 셈이에요. 그러면 헌책방은 어떨까요. 헌책방에서도 들어오기 무섭게 팔려나가는 책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책이 많이 자주 들어올까요? 그렇지 않아요. 헌책방에서는 아무리 잘 팔리는 책이라 해도 어쩌다가 한 번 들어오거나 한 번 들어오고 그칩니다. 외려 잘 안 팔리는 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렇기도 하겠지요. 아무래도 사람들은 자기가 안 보는 책을 버리지 자기가 좋아하고 즐겨 읽을 책을 버리지는 않잖아요. 헌책방에 책을 내놓을 때도 그렇고요. 그래서 헌책방은 온갖 책이 숱하게 있기 마련이라, 가짓수로 보자면 헌책방이 훨씬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책부터 요새 책까지 두루 있어요. 그래서 헌책방 나들이는 책을 구경하는 나들이고, 교보문고 같은 곳 나들이는 물건으로서 책을 사는 일뿐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책을 좋아하시나요?”

“글쎄, 저는 딱히 어떤 책 갈래를 좋아하거나 즐겨찾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은 책, 저한테 좋다고 느껴지는 책을 찾아서 볼 뿐입니다. 그렇잖아요. 좋은 책 찾아서 읽는 일이 중요하잖아요. 책갈래나 책나눔이라든지, 글쓴이와 출판사 지명도 같은 인기라든지, 팔림새는 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어요. 제아무리 이름난 글쟁이라 한들 저한테 반가운 책일까요.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꼭 읽어야 제 삶에 도움이 될까요. 저는 제 모자람을 일깨우고 제가 겪지 못한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면서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느낍니다.”

“책을 많이 사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많은 책은 어디다 두는지? 책은 몇 권쯤 되는지?”

“책이 몇 권쯤 되느냐는 이야기는, 삼성그룹 이건희 같은 사람한테 ‘당신 돈 얼마 있어요?’ 하고 묻는 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제가 뭐 재테크 자랑하는 사람처럼 책테크 자랑할 일은 없습니다. 한 권을 읽었든 백만 권을 읽었든, 제대로 곰삭여서 올바르고 똑바르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느껴요. 책이야 여느 남들보다 많이 읽었고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저한테는 안 많은 책입니다. 이제 겨우 끄트머리를 건드렸다고 할까요. 저는 책을 둘 만한 집을 차근차근 푼돈을 모아서 조금씩 넓은 집으로 옮겨다 니며 간수했고, 이렇게 간수한 책들은 하나하나 제가 앞으로 살아갈 길을 보여주고 비추어 줍니다”

〈4〉 푸념 섞인 한 마디

삼십 분 넘게 이어지는 전화. 전화 받느라 귀가 아픕니다. 이제 그만 끊고 싶은데 자꾸 이것저것 물어 봅니다. 차라리 인터넷편지로 보내서 묻지. 이렇게 전화를 걸면,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를 이 사람(전화 건 사람)한테는 자기 일을 하는 셈이 되겠지만, 전화를 받는 나로서는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마주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미안한 일이 되는데.

“물어 볼 만한 것을 물어 보셔야지, 저도 대답할 만한 기운이 나고, 좋은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지 않겠어요? 참 힘드네요.”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습니다. 히유. 한숨이 푹 나옵니다.

그럭저럭 책을 고르고 책값을 셈할 즈음, 〈굴다리 헌책방〉으로 아주머니 두어 분이 들어옵니다. 한 손에는 배드민턴채를 들고. 딱히 책을 보러 온 분은 아니고, 헌책방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로 찾아오신 듯. 저는 이제 자리를 떠나야겠다 싶어서 〈굴다리〉 아저씨한테 “오늘도 좋은 책 구경 잘하고 갑니다. 다음에 또 찾아올게요.” 하고 꾸벅 인사를 합니다.

고른 책은 짐수레에 싣고, 사진기가방도 짐수레에 싣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기웁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 또 다른 곳을 찾아가 볼까? 출판사에서 일하는 선배한테 문자가 옵니다. 저녁에 시간이 되니 술이나 한잔 하잡니다. 그래, 연신내로 가자. 연신내 〈문화당서점〉도 오랫동안 못 찾아가고 있었으니 그리로 가서 책을 보면서 선배가 일마치고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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