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만권 북한책 수집가 "서러운 내 책들아..."
24만권 북한책 수집가 "서러운 내 책들아..."
  • 북데일리
  • 승인 2007.01.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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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의 방]대전사는 대훈서적 대표 김주팔(66)씨

[북데일리]창고의 책들은 언제나 서럽다. 먼지가루에 눈이 멀고 습기로 몸이 삭을 때까지 책이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 주인과의 재회다. 이들의 숨은 울음은 독서광을 슬프게 한다. 안으로 들여 놓지 못한 책들에 대한 미안함. 그것으로부터 독서광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독서광에게 있어 창고의 책은 영원한 미련이요, 풀지 못한 숙제다.

17년간 4천여 종, 무려 24만권에 달하는 북한책을 수집해 온 독서광 김주팔(66)씨의 창고는 어느 독서광의 창고 보다 암울했다. 대부분이 ‘특별자료’로 묶여 세상에 나올 수 없는 북한책이기 때문이다.

대전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북한책 전문서점의 지하1층, 지상 6, 7층이 김 씨의 책 창고이자 서재. 층 별로 장르를 구분해 놓지는 않은 이유는 아직 ‘일반자료’로 풀리지 않아 상자채로 있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상자 위에 찍혀 있는 ‘NK’(North Korea) 마크가 서글픈 분단의 역사를 실감케 했다. 상자 안에 갇힌 책을 묵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 씨는 “어서 일반자료로 풀려야 할텐데...”라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로부터 들은 17년간의 수집사연은 기이하고, 고단했다.

김 씨는 대전에 위치한 대훈서적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6세 때 책 파는 일을 시작한 이래 서점일만 올해로 50년째다. 대훈서적은 대전을 대표하는 대형 서점. 대전에 3개, 천안에 1개, 3월에 오픈할 지점까지 있으니 겉보기에 김 씨는 남부러울 것 없는 재력가다. 그런 그가 17년간 ‘돈 한 푼 되지 않는’ 북한 책수집에 17년이나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고객이 원하면 무슨 책이든 구해다 준다는 사명감 때문 이었다”고 답할 뿐이었다.

지금이야 편하게 이야기 하지만 모두가 “미쳤다”며 만류한 ‘위험한 일’이었다. 북한책을 들여오며 공항에서 빼앗기기를 수차례. 이적물이라는 이유로 협박, 취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책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가족마저 “서점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17년 전 한 대학교수가 논문에 참고 할 북한책이 있다며 도움을 청해 온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요청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 씨는 짐을 챙겨 서울로 향했다. 유명하다는 책방이란 책방은 이 잡듯 뒤졌지만 북한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김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 홍콩, 중국까지 오가며 책 사냥을 한 끝에 연변에서 책을 찾아냈다.

김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상기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변시내를 수놓던 우리말간판이었다고. “민족적 자부심이랄까. 그런 게 가슴 막 밀려오더라고요. 이렇게 멀리 살고 있지만, 우리글이 있어 한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북한책 과의 감격스러운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책을 받아 들고 기뻐하는 교수를 보니 연구를 하고 싶어도 자료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합법적으로 책을 들여오기로 마음먹은 김 씨는 98년이 되자 허가신청서를 접수했다.

책도 자원이니 산업자원부에 신청하면 맞을 것 같아 그렇게 했더니 3개 월 후 서류를 반려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해당부서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99년이 되던 해 출판은 문화광광부소속이 아니냐는 주변의 말을 듣고 서류를 정리해 문화관광부로 찾아 갔다. 해당직원의 태도는 냉랭했다. 언제 허가가 날지 모르니 놓고 가려면 가고 말라면 말라는 식이었다. “허가를 내주셔야 북한책을 합법적으로 가져 올 수 있습니다”라는 간곡한 부탁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결국,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막막한 싸움이었다. 해답도,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동굴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제주도에서 열리는 출판경영자세미나에 당시 문화부장관이었던 박지원 씨가 강연 차 온 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길로 김 씨는 제주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제주도에 도착한 김 씨는 세미나 관계자를 찾아가 1분만 시간을 할애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서점조합연합회장을 맡고 있던 터라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질의응답시간을 기다리던 차,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장관이 급한 스케줄로 강연을 취소하고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해 진 김 씨는 호텔 곳곳을 누비며 장관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하늘도 정성을 알아 챈것일까. 장관이 10분간 간담회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렵사리 자리에 참석한 김 씨는 용기를 내 입을 뗐다. “장관님, 저는 장관님을 만나러 비행기 타고 제주도 까지 온 대전 촌놈입니다. 저에게 딱 1분만 시간을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뜬금없는 요청에 놀란 장관은 김씨를 주목했다. 수년간 쌓아두었던 말들이 함박눈처럼 터져 나왔다.

“경제나 정치적으로서 통일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화적인 소통도 너무나 중요한 사안입니다. 북한을 제대로 알아야 통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북한책을 합법적으로 가져 올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리에 함께 한 출판인들은 모두 “그러는 것이 좋겠다”며 분위기를 몰아주었고 장관은 직원에게 서류를 받아 처리하라는 말을 남긴 채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3주 후 허가가 나왔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김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연변에 쌓아 두었던 책을 모두 들여왔다.

이후에도 북한책 모으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북한문학을 연구해야 하는 데 자료가 없다며 도움을 요청해 오는 학자, 교수들에게 책을 구해다 주기 위해 1년이면 수차례 여정길에 올랐다. 김 씨에게 책 구하는 일은 숙명이자, 사명이었다. 그렇게 모은 북한책이 24만여 권이 됐다. 돈 안 되고 고생스러운 일에 왜 그리 매달렸냐고 물으니 다시 같은 답을 번복할 뿐이었다.

“저는 책장사니까요. 책장사가 제일 기쁠 때는 고객이 찾는 책을 구해다 줬을 때에요. 그게 유용하게 쓰이는 것 까지 본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책 수집도 그래서 한 거예요. 계속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책은 없으니까. 이익을 떠나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밥 보다 책을 좋아했다는 김 씨는 책과 함께 해 온 자신의 삶이 “무척 행복했다”고 말한다. 인생 후반, 17년이라는 시간을 북한책수집에 투신하느라 핀잔도 듣고, 고초도 겪었지만 후회는 없단다.

김 씨에게는 아직 못다 이룬 두 가지 꿈이 있다. 하나는 “대전을 서점문화의 본거지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에 서점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 책을 접한 것처럼, 그들 역시 우리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김 씨의 생각이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 통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은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배움도 짧고, 가진 것도 없었지만 힘들 때 마다 책을 읽으며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김 씨. 역경을 헤쳐나간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한번 세운 목표는 이룰 때 까지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책이란 그의 소중한 생업이었던 동시에 그를 살게 한 가장 큰 격려였던 셈이다.

“다시 태어나도 책장사를 할 거에요. 살아오면서 잘못한 점들이 많았는데 그것까지 수정해가면서 더 잘 하고 싶어요”

한 책장인의 강인한 의지가 서러움의 분단선을 뛰어넘는 책길을 촘촘히 내고 있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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