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처럼....` 조선족의 위태로운 사랑
`서커스처럼....` 조선족의 위태로운 사랑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7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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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작가 천운영, 그녀의 소설은 읽을거리가 풍성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소설 <잘가라 서커스>(문학동네. 2005)에 나오는 중국 조선족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페리호를 타고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현장 취재를 통해 발췌한 생생한 중국 조선족 사투리와 풍습이 고스란히 소설에 담겨 있다.

제목부터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작품이다. 왜 제목에 ‘서커스’라는 단어를 붙였을까. 서커스라는 묘기는 통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위험한 놀이다. 읽고 난 후에야 알게 됐지만 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실체를 찾지 못한 주인공들이 겪는 내적 상처와 쓸쓸한 사랑의 부재를 암시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조선족인 해화와 동생인 윤호. 해화의 사랑은 잘 포장된 카스테라와 비슷하다. 겉으로는 맛있는 빵을 발견해 행복에 빠져있는 사람의 삶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심하게 부푼 이스트의 속처럼 텅 비어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시어머니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동생 윤호는 장애자인 형을 조선족인 해화와 전략적으로 결혼을 성사시킨다. 처음부터 사랑은 전혀 없는 아슬아슬한 퍼포먼스였던 것. 신랑을 연민의 정으로 감싸주던 혜화는 어느 날 사랑은 동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종일 사랑을 힘들게 느낀다. 서커스 묘기를 부리면서 얻는 사랑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보이는 곳에서는 즐거움을 주는 것 같지만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윤호는 형을 결혼시킴으로서 자신의 짐을 던져버리고자 했지만 그 감정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스스로가 놓은 덫에 걸려서 자신만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뿌리가 없는 사랑은 정체를 드러내고야 만다. 사랑이라는 것. 어쩌면 구름과 같은 모습일 수 도 있다. 겉으로 아무리 포장을 잘 해도 진심이 없다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게 됨을 소설은 말한다.

작가의 청명한 목소리가 소설 곳곳에 울려 퍼진다. 사랑은 열정이나 아름다운 포장이 아니라 따뜻한 위안이라고. 상처를 서로 쓰다듬어 주고 옹이진 가슴을 공유할 줄 아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낯설지만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게 사랑이고 삶이라고. 힘들지만, ‘시지프스 신화’의 숙명적인 업보를 짊어지고 고지를 향해 올라가는 것이 누구나의 삶이고, 사랑이라고 소설은 역설한다.

<잘가라 서커스>

그대는 죽고 나는 살아서

난바다에 닻을 내리면

심해의 바다는

적요함만 치렁치렁하다.

요동치던 격정의 사랑도

침잠하여 하강중이다.

들끓던 욕정도

탈지면처럼 흡수되어

푸르디푸른 고요뿐이다.

눈을 뜨고

눈을 감아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이제 무엇을 사랑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이제 무엇을 사랑이 아니라 부정하지도 못한다.

여기서는 고난도의 기예도

위험한 서커스도 필요 없다.

정처 없이 둥둥 떠다녀도

우리가 부둥켜 앉을 건 사랑뿐이다.

[양진원 시민기자 yjwyoo@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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