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되려 시를 읽나?
바보가 되려 시를 읽나?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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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세 가지 책 : 환경책, 소설책, 시모음

- 1 : 환경책 하나 -

<야생의 푸른 불꽃 알도 레오폴드>(달팽이. 2004)

.. 그는 해뜨기 전 새벽에 일어나 들판을 돌아다녔다. 학교를 빼먹고 숲속에서 지내기도 했다 .. 〈43쪽〉

아침마다 작은 새들이 저를 깨웁니다. 새들은 창가에서 파닥거리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소리를 내거든요. 요즘은 딱새 몇 마리 구경하는 일로 아침 한때가 즐겁습니다. 딱새는 하늘에 뜬 채로 몇 초 동안 가만히 있기도 하는데(쉼없이 날갯짓을 하며), 저 작은 몸에, 날개에, 저렇게 빠른 날갯짓으로 참 잘 나는구나 싶어 놀랍습니다. 박새와 콩새도 자주 보이는 새 가운데 하나. 요 작은 새들은 아주 조금만 먹어도(사람과 견주어) 되겠지요. 조금만 먹어도 얼마든지 자연 삶터에서 잘 어우러지는 목숨붙이일 테지요.

.. 세상의 압박받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눈물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 (알도 레오폴드/편지) 〈63쪽〉

아침부터 하늘에 구름이 많았고, 날이 퍽 포근했습니다. 예전 겨울이었다면 눈이 왔을 날씨인데, 요즘 겨울은 퍽 따뜻하기 때문에 비가 내립니다. 그러나 눈구름이 아닌 비구름임을 느끼는 이 드뭅니다. 이 눈(아닌 비였지만)이 따뜻하게 온 세상을 덮으면서 크고작은 날벌레들을 모두 죽여서 땅에 묻히게 하여 이듬해에 흙에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던 흐름은 차츰차츰 깨지는데, 이를 느끼는 이도 드뭅니다. 아직까지 모기가 다 죽지 않았음을 느끼기는 해도, 왜 모기가 안 죽었는지 깊이 생각하며 자기 삶을 돌이켜보고 바꾸려하는 이도 드뭅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이맘때에는 몹시 추워서 바들바들 떨었는데(올해와 견주면), 올해는 그다지 안 춥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해보다 지지난해가 덜 추웠고, 지지난해보다 지지지난해가 덜 추웠습니다. 0도 아래로 10도쯤 떨어지는 날씨는 아무것도 아닌 지난날이었지만, 이제는 0도 아래로 1도만 내려가도 강추위가 온 듯이 느끼는 요즘 사람들입니다. 몸은 몸대로 여려빠지고, 마음은 마음대로 곪아버렸달까요.

.. 생물학자들 대부분이 개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레오폴드 교수님은 개체군이란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다. … 개체군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을 때, 교수님은 생태계와 그 생태계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 교수님은 자연의 보존이라는 범위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융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 〈246쪽〉

자전거를 타고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또 서울에서 시골로 돌아오는 길에, 수없이 많은 자동차와 부대낍니다. 이 자동차들을 가만히 보면, 다른 자동차한테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도 보이지만, 다른 자동차를 윽박지르듯이 다니는 사람도 보입니다. 어느 쪽이 더 많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와 자동차끼리도 싸우고 윽박지르고 밀고 당기는 사람들이, 자동차와 자전거였을 때, 또 자동차와 사람이었을 때, 또 자전거와 사람이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우리한테 다가올까요.

경주하는 자동차는 경기장에서만 달려야 할 텐데, 보통 찻길에도 함부로 끼어들어 큰일입니다. 경주하는 자전거도 경기장에서만 달려야 할 텐데, 보통 자전거길에도 함부로 끼어들어 큰일입니다. 무기는 제 나라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무기를 많이 만들어 가진 나라치고 힘여린 나라로 쳐들어가지 않은 나라란 없는 지구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하고 맨 먼저’라고 외치면서 ‘자연은 사람들 목적에 알맞게 개발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치고 ‘자연에서 먹을거리-입을거리-쓸거리-잠잘곳’을 안 얻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 2 : 소설책 하나 -

<유모아 극장>(서커스. 2006)

지난달 끝 무렵, 서울 마포구 공덕동을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퍽 예전부터 알고 지낸 분을 만나 낮밥을 얻어먹었습니다. 날이 제법 쌀쌀해 술 한 잔도 곁들였습니다. 술 한 잔 걸치니 몸이 좀 녹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오며 길을 헤매느라 찬바람을 많이 맞았는데, 한결 나았습니다.

.. “이봐. 이봐. 노상방뇨는 일본의 법률에 벌금형이라는 것을 모르나? 파출소에 가자.” 경관의 말투를 흉내 내 큰소리로 꾸짖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상대는 몸을 이쪽으로 틀면서 돌았다. 그 순간 알았던 것이다. 범인은 글쎄, 내가 가자고 했던 그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젊은 경관이었다. “이, 이, 이거야…… 죄송…… 하게 됐습니다.” 그는 바지의 단추를 채우는 것조차 잊고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삐질 삐질 솟아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순찰을 돌다가, 그만, 참을 수가 없게 되어서…….” “아니, 괜찮아요.” 나는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 〈92쪽〉

공덕동에서 만난 사람은 한때 ㅎ신문에서 판매부 일을 했고, 어느 날 마음먹은 일이 있어서 신문사를 그만두고 ㅇ이라는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부서 한 곳에서 일을 맡았습니다. 때때로 헌책방에서 마주치기도 해서 헌책방 가까이에 있는 맥주집에서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안정된 돈-이름을 얻을 수 있는 ㅇ출판사 자리를 떨쳐 나오고 1인출판사를 차립니다.

.. “앗, 회충이다. 조심해.” “뭐라고, 회충?” “그래. 장 속에서 자네 여동생의 영양을 빨아먹고 있는 회충이다. 자네는 어떻게 여동생에게 구충제도 먹이지 않은 거야?” “이봐, 지금 그런 말 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 메스로 죽이는 거야. 이 회충을.” 가까이 다가온 회충을 메스로 찔렀다. 하얀 액체가 주위로 흘러나왔다. 회충이 날카로운 입을 벌리고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 〈29쪽〉

1인출판사를 연 분은 사무실을 따로 낼 돈까지는 없기에, 당신이 아는 제법 큰 출판사 사무실 한켠에 책상 하나 빌려서 전화 한 대 놓고 일을 합니다.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작은 출판사는 더욱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는 판인데, 참 대단한 용기로 일을 벌였습니다.

.. 그때, 나와 쏙 빼닮은 얼굴의 남자가 내 쪽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의 뺨에는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이, 나를 조소하듯이 빙긋이 웃었다. 저것은 나의 분신이었다. 나의 분신이, 매일 전서구처럼 직장을 통근하고, 점심시간에는 카레라이스를 먹고,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아내한테 들키지 않게 가슴을 조마조마하며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 〈167?168쪽〉

소설책을 오랜만에 펼쳤습니다. 소설을 쓴 ‘엔도 슈사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면서, 일본 소설은 여태 몇 권 읽지 않았으나, 당신이 처음 일을 벌여서(출판사 차리기) 손수 우리 말로 옮기기까지 한 책(첫 번역책)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런데 웬걸. 생각 밖으로 재미를 느낍니다. 금세 읽히는군요. 소설이란 이런 거였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하면서, 이 책 하나 엮어내려고 땀을 흘렸을 분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큼직한 책방에서도 묻히는 책이 얼마나 많을까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가는 책은 얼마나 많으며, 딱 한 번이라도 읽는 이 손에 쥐어지지 못하는 책, 평론가들 칭찬이든 깎아내림이든 비판이든 추켜세움이든 한 번이라도 들어 보지 못하고 역사에 묻히는 책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예전에는 ‘판매국 아저씨’라 했다가(그때 그분 나이는 서른도 안 되었을 텐데), ‘편집장 아저씨’라 바꾸었다가, 이제는 ‘사장 아저씨’로 바꾸어 부르는 선배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옵니다(그러고 보니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마구 ‘아저씨’라고 했네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니 참 힘들다고. 그래, 참 힘든 세상입니다. 좋은 책을 내도 좋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적은 세상, 돈을 처바른 책을 내도 돈처바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라는 분은 <유모아 극장>이라는 이야기책을 이런 세상에 내놓았을까요.

- 3 : 시모음 하나 -

<물으면서 전진한다>(갈무리. 2006)

‘일어서는 하청노동자’

이마팍이 짖어져도,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려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몇 방울 꿰매고 곧바로 출근했다

인상부터 구겨지는 업체 총부새끼 낯짝 보기 싫어

산재, 아니 공상처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순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하청, 하청 주제에 억울하면 직영되지

업체에서 나온 비누각 세트 달랑 들고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 무거워도

의례히 하청이니까 참았다

목장갑을 빨아 끼고 찢어진 피스복을 테이프로 붙여 입어도

의례히 하청이니까 참았다

짤리지 않기 위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알아서 기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도 군소리 한 마디 못했다

조선업종 최고 호황 속에서도 다치고 골병들고

정말 군소리 한 마디 못하고 개값으로 죽어나가는 하청 노동자들

참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

……

나는 왜 이런 시를 읽는가? 이런 시가 재미있는가?

그래,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이런 시가 재미있다. 투박한 시라서 즐겁다. 자기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숨김이 없는 나머지 때때로 집회터에서 외치는 서툰 구호를 고스란히 싯말로 옮겨 적었어도, 이런 시가 좋다. 치레가 없으니까. 아니, 때때로 치레가 있다. 괜히 시인이랍시고 깝치는 사람들 글재주를 살짝 흉내 낸 자국이 보인다. 그런 치레를 보면, ‘에이, 그냥 소주잔 기울이며 주고받는 말투로 말씀하시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렇다. 이 시모음 <물으면서 전진한다>는 소주잔 기울이면서 읽는 시다. 소주 한 잔 걸치고 시 하나 읽고, 다시 소주 한 잔 걸치고 또 시 하나 읽고. 그러다가 술이 많이 들어가 해롱해롱 비틀비틀 어지럽다면 책 덮고, 눈도 감고 자리에 드러누워 잠들어 버리면 된다. 그러다가 이튿날 다시 깨어나 하루 내내 부지런히 똥줄 타도록 일한 다음, 다시 술자리에 가서 소주 한 잔 걸치고 시 하나 읽고, 또 소주 한 잔 걸치고 다시 시 하나 읽곤 해야 걸맞는 시모음이다.

‘끝을 물고 이어지다’

……

자정 부근, 탱크 맨홀 뚜껑을 열고 나오면

하, 둥그런 달이 떠 있네

둥그런 달빛 아래 둥그런 달빛처럼 둘러앉아 담배를 피운다

페인트 분진에 새까맣게 탄 똑같은 얼굴들

거울이 필요치 않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냐

담배 한 대 피우자마자 일하고 밥 한 끼 먹자마자 일하고

눈뜨자마자 다시 일하고

도대체 이게 사람 사는 것이냐

시발, 완전히 사람 잡네 잡아

……

사람 잡는 세상, 사람 잡는 시, 사람 잡는 술. 도무지 사람 안 잡는 것이 없는 우리 세상. 학교도 사람을 잡고 일터도 사람을 잡고 정치와 경제도 사람을 잡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영국 프리미엄 축구도 사람을 잡고,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사람을 잡으며, 젊은이들 술판 벌어지는 신촌이며 강남이며 온통 사람을 잡는다. 이 사람 잡는 세상에서 제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갈 길이란 있을까. 있을까?

.. 아이들 잘 키워 보자고 하는 짓인데 / 아이들과 함께 놀아 줄 시간도 없다 .. 〈도장공의 핏속에는 신나기가 흐른다〉

우리들은 잘살자고 이러고 사는가? 잘살자고 이웃 등에 칼을 꽂는가? 잘살자고 남들은 어찌 되건 말건 나 혼자면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되는가? 잘살자고 이라크에도 군대를 보내고, 잘살자고 돈밖에 모르는 정치꾼을 국회의원으로 뽑고, 잘살자고 소비가 아름다움이라고 외치며, 잘살자고 전기제품을 끝없이 새것으로 갈아치워 쓰레기를 쏟아내고, 잘살자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 하고, 잘살자고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오로지 대학교바라기로 만드는가?

그렇다면 나는 잘살고 싶지 않다. 잘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서툴고 엉성하고 여러모로 많이 모자라다고(문학성을 따지면) 할 만한 이 시모음을 읽는다. 못살고 싶어서, 이런 우리 세상에서는 낙오자가 되고 싶어서, 덜 떨어지고 바보 같은 사람, 아니 바보가 되고 싶어서 이런 시모음을 읽는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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