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에서 핀 라일락 같은 시
쓰레기통에서 핀 라일락 같은 시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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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문학은 모든 것이 희미해져가고 설마 우리들이 그랬냐는 의심의 시간에 도착한다. 기억이 희미해져버릴 때 문학은 시간을 되살려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김광규의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민음사, 1995)는 희미해져가는 것을 애도하며 자신의 비애와 시대의 슬픔을 천천히 절제된 시어로 옮겨 적는다.

사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던 이들이 글을 읽고 그것을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일부분 거짓 발언이다. 글을 읽는 독자는 대부분 경험이 부재한 자이며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들은 받아들이는 자료에 백퍼센트 공감하지 못한다.

폭압의 정권을 이해하는 방법은 수많은 텍스트들과 역사적 사료 혹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영상을 통하여 접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김광규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죽어 과거가 되어도 / 역사는 언제나 현재로 남고 / 얽히고 설킨 그 때의 삶을 문학은 정직하게 기록할 것이네.” -<늙은 마르크스> 中

스스로 ‘늙은 마르크스’가 된 시인은 젊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여보게 젋은 친구 / 머릿속의 이데올로기는 / 가슴 속의 사랑이 될 수 없다네”

김광규는 시의 역할 혹은 문학의 마지막 의무이자 사명은 역사의 기록이라고 정의 내린다. 작가란 직업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식처럼 여겨졌을 때 그는 현재를 돌아보고 다시 희미해져버린 과거에 슬퍼한다.

4.19가 나던 해 모였던 친구들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토론을 하고 결론 없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돈을 받지 않고서 불렀다. 18년이 지나고 다시 모인 자리에서 모두들 변했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고,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불현듯 의심이 생겨난다. ‘애초부터 그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분명히 그는 있었다... 그를 보내고 우리가 남은 것일까’ 시인은 ‘그’로 은유되는 존재가 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식어버렸고 탈정치와 된 작금의 현실에서 과거를 찾아보기란 힘이 들었다. 아차! 하는 사이 “세상은 이성을 잃고 너무나 오랫동안 그들을 잊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들을 의도적으로 잊어갔는지 모른다.

모두들 무관심한 척 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최류탄 가스를 마시며 길거리를 돌아다닌 한 때가 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그들이 살았던 ‘안개의 나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곳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안개의 나라’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그 때, 그들은 진실을 보는 것 대신 듣는 것을 택했다.

“언제나 안개가 짙은 / 안개의 나라에는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에 익숙해져 /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안개의 나라> 中

‘안개의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은 일부는 순교자처럼 죽어갔고 일부는 진실을 들으려 귀를 쫑긋 세운 결과 ‘하얀 안개의 귀’를 가졌다. 그들이 살았던 거리는 침묵의 구호를 시체처럼 널었고 상점마다 바겐세일 깃발을 펄럭였다. 안개 낀 새벽길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몸 속에 퍼지는 암세포까지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로 하루를 살고 미래를 보았다.

헌데, 시인의 눈에 비쳐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재를 근근히 버티는 모습이다. “나는 언제나 오늘만을 사랑한다”며 여자와 남자는 버스 속에서 무관심하게 직장으로 출근하고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관조할 뿐이다. 활동적이던 사람들이 소시민으로 변하고 폭압이 사그라졌다고 한들 가난이 끝난 것은 아님에도 시인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인은 정치만 생각하고 경제인은 경제만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생각만하고 오늘을 보람차게 살아간다. 안일한 생활 가운데 낙원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시인은 그와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면 휴지와 권력, 돈과 착취, 폐허와 공해만 남을 뿐이라고 읊조린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

이제 공중에서 보아주는 이 없어도 곡예줄을 타는 사람이 없다. 더 슬픈 것은 시대의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낯선 사람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외톨이가 되어비린 시인은 목청껏 말하고 싶어도 침묵한다. 그 옛날 보지 못했던 시절이 가고 나니 이제는 말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 시절은 힘에 짓눌렸지만 이제는 무관심이란 침묵의 폭력에 휘둘린다.

김광규 시인은 비겁하게 도망치고, 경험으로 쌓아 올린 개인의 비극과 기억을 내 팽겨 치는 사람을 향하여 ‘점점 작아진다’는 비유를 던진다. 이제 사람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해져 힘을 잃었다. 세상은 이미 쓰레기통 속에서 끝장을 보았고, 쓰레기통 자체가 되었다. 김광규 시인은 ‘돈으로 끝장난 그 쓰레기통’ 속을 허무하게 바라보면서 절제된 시어를 구사한다.

이 시들이 진정아름다운 이유는 비극과 절망의 허무 속에서 한 줄기의 희망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는 법을 잊었지만 달리고 싶다하며 궁극에는 날고 싶다고 한다. 시인은 그 절제된 언어의 끝에서 기도를 한다.

"계속하여 약속된 미래 / 낙원의 땅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소액 주주의 기도> 中

시집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질문에 종지부를 찍듯 말한다. 언젠가 쓰레기통 속에서 라일락이 필 것이란 기도. 그것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으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시대와 시간을 살아온 자들을 애도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으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 - <오래된 물음> 中

[이도훈 시민기자 mbc7980@naver.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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