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에 대한 생각<1> 세일즈맨의 죽음
책이름에 대한 생각<1> 세일즈맨의 죽음
  • 북데일리
  • 승인 2006.12.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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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오닐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 아서 밀러의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장영희-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5) 44쪽

[북데일리] 중학교 3학년 때라고 떠올립니다. 그때쯤부터 학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앞두고 다닌 학원이고, 영어를 좀 더 배워야겠다 싶어서 다녔습니다. 이때 가르친 강사는 여러 가지로 피를 뽑듯 정성이었는데, 그렇게 해야 자기도 인기를 얻으며 먹고살 수 있었겠지요. 그만큼 온힘을 다했다고 볼 수 있고요.

┌ Death of a Salesman

├ 세일즈맨의 죽음

├ 회사원 죽음

├ 회사원 죽다

├ 회사원이 죽다

├ 죽고 만 영업사원

├ 죽어가는 영업사원

└ …

그때 영어 강사는 여러모로 제 마음에 남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먼저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따온 글(지문) 100가지를 외울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교과서나 참고서 말고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 강사가 한 말을 마음에 새기며 성문종합영어를 한 장씩 뜯어서 외우고 찢어버리곤 했고, 책방을 다니며 부지런히 다니며 영어로 된 소설책(페이퍼백)을 사서 읽곤 했습니다(영어 소설책을 읽은 때는 고2부터. 중3 때는 영어 동화책을 보고. 이 강사한테 여러 해 배웠거든요).

한편, 언젠가 강의 때,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책이름을 어떻게 우리 말로 옮기겠느냐고, 이 책을 쓴 사람이 왜 ‘a’를 썼느냐, ‘the’를 쓰면 어떻게 달라지느냐, ‘die’가 아닌 ‘death’를 써서 책이름을 붙인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세일즈맨’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 …… 여러 가지를 따지면서, 영어를 우리 말로 옮길 때 너무 가볍게 옮겨서는 안 된다고, 우리보고 나중에 이 책이름을 재주껏 풀어 보라는 숙제를 내주었어요.

‘한 세일즈맨의 죽음’,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옮기기도 했던 《Death of a Salesman》. 요즘은 어떤 책이름으로 흔히 쓸라나.

한동안 머리를 굴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잊어버렸고, 여태껏 이 책이름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난 일이 떠오르면서, 그때 영어 강사를 했던 분이 참 좋은 숙제를 내주었구나 싶고, 이 숙제 덕분에 우리 말과 번역 문제를 더욱 깊이 살필 수 있어 고맙기까지 합니다.

┌ 회사원이 죽다

└ 죽은 영업사원

제 생각입니다. 제가 미국 문학을 공부해서 아서 밀러란 분 책을 우리 말로 옮겼다면, 요 두 가지 책이름 가운데 하나로 잡았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회사원이 죽었네”처럼 말끝을 달리할 수도 있을 텐데, 이건 나중 문제고, 미국에서 ‘세일즈맨’이라고 하는 그 사람,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헤아린다면, 우리 말로는 ‘회사원’이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소설 주인공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거든요. 다른 한편으로는 늘 회사 밖으로 나돌면서 영업을 하기 때문에 ‘영업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회사를 다니는 이들은 으레 이 두 가지 말, ‘회사원-영업사원’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들도 이런 말로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일즈맨’은 이렇게 풀어내는 편이 좋으리라 봅니다.

다음으로 ‘죽음’이라는 말인데, “회사원의 죽음”처럼 쓸 수도 있으나, 번역이란, 옮기는 나라밖 말과 문화뿐 아니라, 옮겨내는 우리 말과 문화를 함께 살펴야 하는 일입니다. “(무엇)의 (무엇)”처럼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겠지요. 그래서 처음 이 소설을 옮길 때부터 여태까지도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썼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무엇)의 (무엇)”으로 쓰는 말투가 알맞게 쓰는 우리 말투일는지요.

요즘 들어 더더욱 토씨 ‘-의’가 곳곳에 많이 쓰이지만, 이렇게 많이 쓰이는 토씨 ‘-의’가 알맞을는지요. “아버지의 꿈”보다는 “아버지 꿈”이, “초록의 공명”보다는 “초록 공명”이 우리 말투와 가깝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회사원 죽음”처럼 써 볼 수도 있어요. 이 이름도 좋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번역을 끝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말 빛깔과 문화를 헤아린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편이 좋다고 느껴요. 지난해부터 읽어서 내일이면 마지막 쪽까지 다 읽을 책 가운데 하나로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름은 “내 나이가 어때?”, “내 나이가 어떤데?”, “내 나이가 뭐?”처럼도 쓸 수 있어요. 그러면, “내 나이가 어때서?”를 영어로 옮길 때하고 “내 나이가 어때?”를 영어로 옮길 때하고 다르게 옮기게 될까요?

말끝 하나로, 말씨 하나로 뜻이나 느낌을 살짝 바꾸기도 하고 다르게 느끼도록 하는 우리 말 문화입니다. 그래서 “회사원 죽음”에서 조금 더 나아가 “회사원이 죽다”로 써 볼 수 있고, “죽은 영업사원”처럼 써 볼 수 있어요. “죽고 만 영업사원”이라든지 “회사원이 죽었네”나 “회사원 죽었구나”처럼 써도 어울리고요.

나라밖 책을 우리 말로 옮길 때 붙이는 책이름은 때에 따라서, 곳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고 봅니다. 달라질밖에 없겠지요. 예전에는, 또 앞으로 언제까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쓸는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줄곧 이 이름으로만 쓰란 법은 없다고 봅니다. 얼마든지 더 알맞을 말로, 우리 삶과 문화에 다가서는 말로 풀어낼 수 있겠지요. 제 어릴 적 영어 강사 아저씨는,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굳게 하지 말라고, 늘 말랑말랑 부드러이 움직이도록 하라고,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책이름 하나 우리 말로 옮기는 숙제를 내주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그분을 다시 만나서 물어 봐야 제대로 알겠지만.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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