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내 말 좀 들어봐!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 북데일리
  • 승인 2006.12.2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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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줄리언 반스의 반짝이는 여섯 번째 소설인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열린책들. 2005). 작가의 91년 작으로 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참 재미있게 빌려 읽었던 소설입니다.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상의 신선함도 좋았지만, 소설 안의 인물들의 솔직 담백한 상담 혹은 설득(talking it over)이 꽤나 적극적인데다가, 상식이나 관찰의 수준이 허를 찌르는 경우가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국내에는 1997년에 나왔던 이 소설이 2005년, 다시 ‘열린책들’에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반가웠답니다.

솔직히 20대 초반에 책을 읽었을 때만큼의 즐거움은 아니었습니다. 아악, 대체 왜 그랬을까요? 감정몰입을 잘하는 편인데도, 슬슬 남녀 간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에 관심이 엷어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이 이런 것일까요? 남녀 간의 사랑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가치, 이를테면 가족, 삶, 올바름 같은 것들에 더 큰 감동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전(全)인류의 화두인 ‘사랑’으로부터,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니, 나만 그런가 싶어 걱정이 살짝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새의 트렌디 드라마에도 몰입을 못하는 걸까요?

아무튼, 처음에는 재미있게만 봤던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으며 ‘사랑’이 아닌 또 다른 많은 것들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사랑’보다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으므로,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여기고 여러분 앞에 올려놓습니다. 패-스.

롤랑 바르트는 서술의 층위를 설명할 때, 서술 층위의 기본적 전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작가와 실제의 독자가 있다면, 텍스트 안에 내재하고 있는 내포작가와 내포독자, 그리고 화자와 수화자 역시 존재한다고 보는 거지요.

소설 <내 말 좀 들어봐>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교 동창생으로 가까운 친구인 스튜어트와 올리버, 그리고 둘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질리언이라는 여인. 단순한데다가 전형적인 삼각구도라 조금 식상할 것도 같지만, 셋은 같은 사건을 각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입장을 상담하듯, 혹은 하소연하듯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리버와 스튜어트, 그리고 질리언이 화자가 되어 텍스트 안의 내포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독자들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그것이 2인칭 소설처럼 실제 독자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지요. 독자의 참여도가 커졌으니 독자 입장에서는 으쓱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소설에서도 김영하, 이기호 등에서 이러한 형식의 소설들을 접할 수 있으니 우리 소설들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 명의 인물이 같은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속>을 생각나게도 합니다.(류노스케가 이른 1922년에 발표했음을 생각해 볼 때, 그가 천재적인 작가였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합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 세 명의 화자의 진술을 통해 진실에 점점 가까이 갈 수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라면, 류노스케의 소설은 진술을 통해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게 하여 독자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책 안에는 ‘사람들은 눈으로 봤다는 듯이 거짓말한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러시아 속담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소통’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단정’지을 뿐, 누구도 ‘소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셋은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셋은 각기 자신들이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상담을 늘어놓는 그들 역시 독자와 소통하려 들지 않지요.(물론, 독자가 피드백할 수 없다는 점이 이러한 형식의 소설들의 한계이기도 하겠지요.)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의 이기적인 면면을 꼬집어내는 소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 전개의 속도가 빠른 편이고, 독자를 향한 각각의 모놀로그들은 날치 알의 질감처럼 살아있어서, 웃음을 짓다가도 그들이 고백하는 신랄한 솔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작가의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 능력도 높이 사는 부분입니다. 곳곳에는 현상을 정확하게 집어내어 서술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참으로 맛깔스럽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은 포스트잍을 붙여가며 책을 읽는 편인데, 옆구리가 무당집처럼 알록달록해졌습니다. 문득, 이런 부분을 요새 인기 있는 알랭 드 보통이 상당부분 이어받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포스트 모던 작가계열에 속하는 줄리언 반스의 또 다른 유명한 소설 중에 어떤 분은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더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둘 다 제각각 좋았기 때문에 솔직히 어떤 게 더 좋았다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반스의 소설은 신재실 교수님의 번역으로 꽤 나와 있네요. 저처럼 한 작가를 파고들길 좋아하시는 분들은 <플로베르의 앵무새>, <태양을 바라보며>,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정도를 읽어보시면 줄리언 반즈를 제대로 느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남은 2006년 야물게 마무리 하시고, 즐거운 연말, 즐거운 책으로 나날이 풍요로워지시길 바랍니다. 가든한 새해!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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