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한 구성, 치밀한 문체 `러시아 인형`
교묘한 구성, 치밀한 문체 `러시아 인형`
  • 북데일리
  • 승인 2006.12.18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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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노출한 리얼리즘 소설을 읽고 머리 위부터 묵직한 압박감을 느끼고, 환상의 세계를 동동 떠다니면서 별가루 뿌린 지팡이가 온몸을 긋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호불호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매력적인 경험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꽤 오랜 기간 동안 깊이 생각해보고 주위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때도 있고, 별가루에 취해 한동안 실실 웃음을 흘리고 다닐 때도 있습니다. 몰입이 쉬운 독자의 장점일까요, 단점일까요.

며칠 전 손을 베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급히 칼질을 하다보니 왼쪽 엄지손가락을 베게 되었는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더군요. 정도가 심해 꿰매야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대충 갈무리하고 지혈을 하는데 수건으로 쉴 새 없이 스미는 피를 보며, 주착스레 괜한 눈물도 몇 방울 똑똑 떨어졌습니다.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붙잡고 있다가, 울컥한 마음이 쉬 가라앉지 않아 ‘께세라세라’의 심정으로 옆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는데, 그 책이 바로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의 <러시아 인형>이었습니다. 문득 욱신하고 시큰했던 내용들이 떠오르면서, 하얀 바탕의 책 표지 역시 선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위안이 되더군요.

앞서 말했듯 환상이면 환상, 현실이면 현실, 철저히 각 세계를 묘사하는 소설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환상과 현실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소설은 흔치 않습니다.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인데 환상에 가깝고,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현실에 도달해 있게 됩니다.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뫼비우스의 띠가 따로 없습니다. <러시아 인형>(문학과지성사. 2003)은 보르헤스의 절친한 친구인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의 소설로서, 남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으로 여러분 앞에 살포시 꺼내놓습니다.

이 책은 비교적 최근의 소설로 이루어진 단편 모음집입니다. 처음엔 남미문학인지 모르고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호되게 뒤통수를 맞았던 첫 기억이 있던 터라, 다시 잔숨을 고르고 꺼내든 그의 소설은 여전히 강했고, 그러한 와중에서도 날카로움과 섬세함, 그리고 절제미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열 넷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는, 기본적으로는 환상에 기대고 있지만, 환상을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회․정치적 모습과 기차게 맞물리게 합니다. 그의 소설에는 현실과 환상의 이음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좋겠네요. 구성은 교묘하고, 문체는 치밀하며, 내용 역시 평탄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편들 중에서 예술과 정치의 모순에 대한 아이러니로 날카롭게 서려있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카토’와 사랑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단편, ‘물 아래에서’, 그리고 ‘세 편의 작은 환상 작품’ 중 구조가 인상적이었던 ‘어떤 냄새’와 기담에 가까운데다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던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제목인 ‘러시아 인형’도 아주 충격적인 결말처리가 인상적입니다. 이 단편집은 까사레스의 후기 작품(1991)이라 환상의 정도가 덜하다고 해요. 그의 초기와 중기의 문학은 정말 ‘환상 문학의 대가’라고 불릴 만큼 대단하다고 하니(물론, ‘환상문학의 대가’로만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참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구는 닮는 거겠죠? 50년 이상을 같이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소설 곳곳에 보르헤스가 보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환상하고 비슷하나,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색다른 맛이 느껴지니 직접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둘은 실제로 지음(知音)같은 존재였다고 해요. 둘은 나이차가 열 살을 훌쩍 넘으니, 보르헤스의 그늘에 가려 안타깝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소설가였습니다. 실제로 보르헤스가 나이차에 관계없이 공동작업을 수행할 때 까사레스가 비밀스러운 스승이었다고 말할 정도이니, 까사레스에 반한 제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의 다른 문학작품 역시 접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맘 좋으신 어떤 출판사가 그의 <모렐의 발명>이나 <영웅들의 꿈>을 얼른 번역해 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중입니다.

불가리아 출신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성의 핵심요소는 독자가 텍스트를 접하면서 경험하는 망설임과 불안함이다. 환상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핵심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수용할 것인가 배격할 것인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다.”라고 했습니다. 토도로프의 말처럼 우리는 까사레스의 작품에 강하게 빨려들어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는 공중에 난 다리를 위태위태하게 건너게 되고, 결국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보르헤스의 말처럼 ‘꿈에 의한 현실의 감염’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상하셨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나와 있는 까사레스의 작품은 <러시아 인형>이 전입니다. 국내의 불균형한 작품 수급 현황을 생각해볼 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나, 아쉬운 입맛은 어쩔 수 없습니다. 다행히 보르헤스와 까사레스 두 사람이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필명으로 공동집필한 추리소설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은 국내에 나와 있으니, 호기심이 동하시는 분들은 꼼꼼하게 읽어보시고 사고와 구조의 묘미를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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