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그 후, 영화 같은 120분간의 생존
9.11테러’ 그 후, 영화 같은 120분간의 생존
  • 북데일리
  • 승인 2006.12.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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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민주주의 안에서 사는 유일한 장점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것은, 민주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독재는 비판할 수 없다. 비록 공격받고, 위협받고, 조롱당할지라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나쁜 면을 이야기하면서, 민주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p307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권위 있는 특권은 우리가 민주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권리가 손 안에 있을 때 민주주의적 비판이 가능하다. 특권이자 책임이자 그것은 진보를 위한 의무이다. 과거를 성찰하지 않는 것은 현재에 과거의 전철을 회귀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현재에 일어나는 동시대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진보의 초석은 사고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자기 비판적 권리를 찾는 것이다.

<살아있어 미안하다>(문학사상사. 2005)의 저자 프레데리크 베그베데는 그 과업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행하고 있다. “9.11테러”라는 충격을 눈으로는 목격했으나 ‘보이지 않는 진실’로 가려진, 현재 진행 중인 역사를 가슴으로 품는다. 작가는 자기 삶의 방식인 글쓰기를 통해서 비판적 성찰을 거듭한다.

세계무역센터가 폭격당하고 120분간의 생존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주인공인 카튜 오스톤이 두 아들과 107층에서 식사를 하는 그 시간대와 그 후 글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를 병행시키면서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을 보는 것처럼 진행시킨다. 자칫 이야기의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으나 그와 더불어 소설은 작가 자신이 인물들에게 동화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사건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효과를 낳는다. 소설의 챕터도 각 1분 단위로 120개로 나뉘어져있어 더욱더 리얼하게 현장을 전달하고, 과거가 아닌 현재를 느끼게 하는 시간 감각을 유도해낸다.

작가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카튜 오스톤은 자본주의의 허무에 허덕이고 있으며 기성의 권위에서 탈피하여 쾌락에 젖어있다. 소설이 그려내는 세상은 이미지로 콜라쥬된 사회이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도입하는 영화들이 사건 현장으로 환원되어 오며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카튜 오스톤은 <아메리칸 뷰티>의 부루주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탈미국화 된 혹은 반미국화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소설에서 형상화되며, 세계 각국은 미국에 열등감을 지니고 살아간다. “9.11 테러”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세상은 탈미국화 혹은 반미국화를 꿈꾼다. 미국, 그곳은 꿈의 나라지만 그 안에서 꿈을 꾼다는 것은 잡히지 않는 욕망을 품는 것과 같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증오가 사랑으로 나타난다. 미국을 향한 증오가 미국을 향한 사랑을 낳고 꿈을 낳았다.

“미국이 불러일으킨 증오, 그것은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당신을 그만큼 증오하는 어떤 사람, 당신이 자기를 그만큼 증오하기를 원하는 어떤 사람, 그 사람은 당신의 관심을 끌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p289

작가는 문학이 작금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충만한 사회, 세계화가 이루어지면서 텔레비전이 선도한 이미지의 사회이다. 보드리야르가 이미 지적한 대로 이미지가 실재를 앞도 한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들이 세상을 해석하게 하고 이미지들은 은유를 만들어낸다.

“유일하게 흥미 있는 주제들은 금기이다. 금지된 것을 써야 된다. 프랑스 문학은 장구한 불복종의 역사이다. 지금, 책은 텔레비전이 가지 못하는 곳에 가야 한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게 바로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문학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살아 있어 미안하다>는 세밀하게 시간을 재구성하고 공간을 다시 세우는 책이다. 그에 덧붙여 작가의 고해성사와 같은 글쓰기가 이어진다. 브레히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이야기했듯.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묻어난다. 세상은 쿤데라의 ‘농담’처럼 파괴의 미학이 가능한지 되물었고, 이 세상은 파괴의 미학으로 충만하다고 답한다. 파괴의 미학이 이루어지는 세상. 살아남은 자들이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북데일리 이도훈 시민기자] mbc79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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