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시` - 우리가 행복하게 눈물 흘린 시간
`우행시` - 우리가 행복하게 눈물 흘린 시간
  • 북데일리
  • 승인 2006.12.0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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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진정으로 참회하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 삶과 상처를 딛고 차마, 아무도 하지 못하는 용서를 하려는 사람들, 그분들과 함께 나는 감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살고 싶다” - 공지영, 탈고후기

[북데일리] 얼마나 되었을까? 슈잔 헤이워드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재판장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 때는 얼마나 오래 전이였을까? 32살의 꽃다운 여인이 가스실에서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오열하던 말, `나는 살고 싶어요.`라는 무서운 떨림이 어린 내 마음에도 깊은 탄식의 깨어진 유리가 되어 혈관 어느 구석엔가 박혀버린 그 때, 나는 몇 살이었던가? 무심하게 살아오다 또 다른 사형의 소식이 들려오면 혹은 그런 장면이라도 영화에서 마주하게 되면 그 날 그녀가 내게 던진 `나는 살고 싶어요.`라는 유리 파편은 온 신경을 긁어댄다.

`신비롭게도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린다. 더더욱 신비롭게도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 데 또 일생이 걸린다.` 세네카의 말이다. 종교적 신앙심 때문인지, 아니면 나란 존재가 밝음보다는 어둠과 천성적으로 친밀하도록 구조된 인간인지 잘은 몰라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삶과 한 자리에서 숨을 쉬고 있고, 우리 누구나 삶과 죽음의 시간을 동시에 사는 것이라 느껴왔다.

그렇지만, 삶의 시작, 죽음의 시작을 관할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그 어떤 신성한 불가침의 영역 속에서 비밀스럽게 조정되는 우주의 것이기에 나는 감히 그 때가 언제인지 묻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죽는 순간을 인간으로부터 언도받는 사람들의 삶의 순간과 자신의 죽음은 신이 언도하실 것이라 믿는 평범함 우리들의 삶은 모두가 죽음을 끝점으로 무기의 기간을 살고 있다는 불안감에서는 동종의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이 기실 가까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로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으되, 사형제도에 의해 무기의 짧은 나날을 살아가야하는 그들에게는 언제나 모 월 모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 절실히 느껴지는 - 떠나보내는 것을 인식해야하는 - 순간들의 외줄 위에서 두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첨예한 공포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축에서 바라볼 때 너 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에서의 시작이 있던 사람은 무기의 삶을 살다 죽음이라는 끝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삶의 축에서 바라볼 때. 기실 우리 누구나 무기수의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비교적 태연할 수 있는 우리네와 번쩍이는 낫을 들고 길고 서늘한 그림자를 앞세워 성큼 다가오는 크로노스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네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순간에 처해있는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을 체감하는 정도의 차이이고 그것이 바로 사형수들에게 내려진 형별일 것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 2005) 속의 사형수 연수도 그랬다. 삶에 집착이 없을 수밖에 없는 죄 많은 삶, 사랑이라곤 눈곱만치도 받아본 적이 없어 행복한 듯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 연인들을 증오하던 삶,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삶, 실명한 동생이 강간과 조롱을 당하는 것을 목격해야했던 삶, 윤수의 삶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가를 실험당한 가혹한 27이었다.

그가 갱생을 약속하고 최초로 인간답게 살고자 발버둥 치던 그 짧지만 행복한 시기에도 운명의 삭풍을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가 사랑하는 여인의 뱃속에 자궁 밖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장님 동생을 잃은 후 최초로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윤수는 더럽게도 운이 없었다.

결국 삶의 의지를 박탈당하는 것에 길들여진 그에게는 모든 죄가 뒤집어 씌워지고 삶은 철저히 그를 기만하고 만다. 그런 그에게 판사가 사형을 언도했을 때, 그는 세상을 향해 조롱하듯,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우롱한다. 천인무도한 중죄인이라고 신문을 떠들어 대지만, 그에게 삶은 고통의 동음이어일 뿐이었다. 그런 그도 칠순의 모니카 수녀의 진심어린 정성에, 그리고 그녀의 여조카인 문유정의 사랑에 계절의 색깔과 냄새의 변화에 민감해져 간다.

누군가에게는 최후의 삼십분이지만, 문유정은 삼 십분 정도는 가볍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곤 하는, 삶을 살해하고 싶은 세 번의 자살 미수자이자 알코올중독자이자 신경증 환자이다. 그녀 역시 열다섯 어린 나이에 사촌 오빠로부터 강간을 당한 슬픈 기억이 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그녀의 상흔을 문유정은 상투적일 것 같지 않은 윤수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녀 역시 다시 살아가고 싶은 욕구를 되찾는다.

"살려주세요. 신부님 살려주세요. 무서워요."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 윤수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얼굴에 용수를 뒤집어 쓴 윤수가 삶의 끝자락에서 느낀 것은 자신이 그토록 부인하던 삶에 대한 애착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이 막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죽음 - 사형

"사형 제도는 그 벌을 당하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이다.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 생명이 다하지 않은 제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다.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

우리는 교화하기를 포기해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약 서른 명 정도를 사형 집행한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교화하기를 포기해버린 사회에는 복수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도적의 허점을 은닉하는 법전이 있고,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사회의 안전과 안정을 교란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인간을 인간말종으로 구분하고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저비용으로 처리하고자 한다.

나는 사람이 전적으로 선하게도 전적으로 악하게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사람의 선천적 성정은 유전적으로 70%만이 결정되어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나머지 30%는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로 부터 받은 사랑.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그가 받은 교육, 전수되어 통용되는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후천적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 믿던 70%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고 인간의 인성이나 성격이 18세까지 꾸준히 개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무엇을 시사하는 연구인가? 도덕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들은 사회라는 기구의 효율적 운용을 앞세워 교화될 수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구분 짓는 데만 능하지, 왜 그런 극악무도한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비인륜적이라 스스로 명명하는 행위 이전의 동기나 원초적 행위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우리들의 효율성의 기준에 따르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변명이고 우리의 이기심인 것을 우리의 자존심은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죽음이 언제 통보될 지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사형의 집행을 앞두고 그 집행의 시간을 선고해주지 않는 구치소의 사형수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참으로 나약하다. 적어도 알고 있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건만, 우리는 그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 마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짐승 같은 인간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서비스인 것처럼 우리는 비열하다. 그리고 우리는 게으르다. 인간이 예측할 수 있고, 막을 수도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죽음인 처형이지만, 우리는 막을 수 없다. 우리는 고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야 유전적 우열학이 지켜지며 그래야만 사회의 구조가 튼튼하다고 믿는 위정자들의 보호주의 때문인 것을....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십자가형. 로마가 극악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한 형벌.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는 것 자체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며칠 전 부터 고문을 한다. 죽을 만큼 때리고, 심지어 눈을 뽑기도 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있는 그들이 자신을 매달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른다. 채찍질로 으스러진 갈비뼈를 감싸고 있는 살갗이 터져나갈 때까지 매를 맞으며 끝내 언덕을 오른다. 그리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이글거리는 태양과 어둠의 적막 속에서 죽음의 환영에 까무룩 빠져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이다.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피비린내 나는 그들의 감각이 붙어있을 육신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의 후들거리는 살점은 짐승들의 밥이 되고, 그들의 영혼은 불안 속에서 사그라진다.

그렇게 예수도 갔다.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십자가상을 교회의 첨탑 위에 걸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교수형을 달았더라면, 예수의 목을 매단 올가미를 교회의 첨탑 위에 세워두었을 것이다.

죄 없는 예수가 사형수로 처형된 것은 윤수에게는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누가 윤수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감히 그 처지가 되어보지 않은 윤수의 고통을 누가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해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는 격이 다르다. 안다는 것은 통증 없이 이해되는 두뇌의 작용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가능하다. 그래서 그가 느끼는 것을 추상할 수 있고, 자신을 지탱해온 신념이나 가치관 따위와 충돌할 수조차 있을 그의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통증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행위가 이해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상태 동사가 아니라 엄연한 동작 동사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되었다. 예수는 자신과 나란히 못박인 살인자와 도둑을 용서해주었다. 그들을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몸을 낮춰 그의 아래에 서는 것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를 닮고 싶어 하나 결코 예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러나 마지막에 자신의 살인을 용서한 삼양동 할머니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빈 연수, 자신으로 인해(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죽을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용서를 비는 연수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예수를 닮았다. 누가 연수를 죄인이라고 사형으로서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시간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박상중 스님

작가 공지영은 말한다. 자신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노라고.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모른다`는 말로 지나쳤을 것들을, 몰라서는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진정으로 참회하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 삶과 상처를 딛고 차마, 아무도 하지 못하는 용서를 하려는 사람들, 그분들과 함께 감히 그녀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행복한 시간. 그것은 존재가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당신과 나, 진정으로 얼마나 진심을 말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당신과 나, 얼마나 진심으로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 해를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인 것은 내게는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만큼의 숙제가 남겨진다. 또 다른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나는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한다는 다른 표현이며, 진정한 사랑은 내가 언제나 주장하지만, 감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아야한다. 나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키웠는가?

나는 아주 뭉클해진다. 두 밤사이 잠을 앗아간 책읽기였지만, 내게는 그만큼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윤수와 같은 이가 또 다시 그린 마일을 걷게 된다면, 그의 죽음 후, 갱생이 가능하도록 믿어주는 그런 따듯한 나라로 가기를 바란다.

(사진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스틸컷)

[북데일리 시민기자 김영욱] syl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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