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집필실] 소설가 이기호
[작가의 집필실] 소설가 이기호
  • 북데일리
  • 승인 2006.11.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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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집필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펴낸 이기호

집필실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온전한 작가의 공간이다. 메마른 글밭을 갈아엎길 수차례. 비대신 눈물을 뿌리고 매캐한 담배연기를 비료삼아 언어를 싹 틔우는 작업을, 작가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해나간다. 작가들이 집필실 공개를 꺼리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게다. 남모를 한숨과 회한이 서린, 내밀한 공간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왜 모르겠는가.

소설가 이기호(34) 역시 방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집필실이라고 하기도 뭐하다고, 겸연쩍어하는 그를 밀쳐내다시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책장. 어림잡아 수천 권은 돼 보이는 책이 한쪽 벽을 장악하고 있었다.

베란다까지 점령한 책들을 제외하곤, 서재 내부는 단출했다. 책상과 서랍장 하나가 살림살이의 전부. 썰렁하다 못해 ‘황량한’ 공간을 작가가 글을 쓰며 피워댔을, 인터뷰 중간 중간 피운, 담배연기가 채우고 있었다.

여자부터 소설까지, 내 인생 최대의 라이벌 ‘박범신’

책상 위에는 유일한 집필 도구인 노트북, 꽁초 가득한 재떨이, 연필통이 놓여있었다. 장식품이라곤 기묘하게 생긴 돌멩이 하나가 전부. 돌 위에 그려진 ‘부릅뜬’ 두 눈이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돌은 스승 박범신이 킬리만자로에 다녀오면서 선물한 것. 스승이 선물을 건네며 한 경고(?)는 이렇다. “내가 늘 지켜보고 있다.”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 기지개라도 펼라치면 어김없이 돌과 눈이 마주친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들킨 학생마냥, 작가는 얼른 고개를 숙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채찍하는 스승을 한번쯤은 이겨보고 싶은 듯, 이기호는 인생에 있어 최대의 라이벌로 박범신을 꼽는다. 얼마 전 ‘박범신 북콘서트’도 찾아갔다가 ‘짜증’이 나서 인사만 하고 돌아왔다.

“관객도 여자가 대부분이고, 사회는 여자 아나운서가 보고. 이 양반이 아직 안 죽었네... 기분 나빠서 그냥 나왔어요.”

박형서, 백가흠, 김중혁, 윤성희, 편혜영은 경쟁자이자 동년배 친구들. 친하지만 자주 보진 못한다. 대신 그네들의 소설을 한 편 읽고나면,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만나지 않아도 그 사람 일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고,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전한 것만 같다.

“소설이 갑자기 좋아지면, 애가 뭔 일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보증을 잘못 섰나? 이혼을 했나? 근데 그게 100% 맞아요. 박형서가 최근에 쓴 소설(‘두유전쟁’)도 전작보다 나아졌길래 물어봤더니 박사 논문이 빠꾸를 맞았을 때 썼다네. 좋은 글이 나오려면 작가에게 끊임없이 불행이 찾아와야 해요. 도스토예프스키 형도 도박 빚 때문에 맘고생하고 그랬으니까, 걸작이 나왔잖아요.”

책상에 올려져있는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을 살짝 들춰봤다. ‘기호에게. 2006.11.6. 박형서’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작품 뒤에 숨겨진 일화를 들어서인지, 비스듬한 글씨체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단순한 인물은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장치”

이기호는 ‘단순’하다.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성격부터 그렇다. 서랍장 위 클래식 라디오도 클래식 채널에 주파수를 고정해 놓았다.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들으면, 집필에 방해가 된단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 역시 작가를 빼다 박았다. 오직 노래에만 반응을 보이는 버니(‘버니’), 학업도 제쳐두고 종교에 심취한 최순덕(‘최순덕 성령충만기’) 등. 소설 속 주인공 중엔 멀티플레이어가 없다.

“인물의 선이 단순하고 명쾌해지면... 평론가들이 싫어하죠.(웃음) 소설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소통의 차원에서는 원활해지는 면이 있어요. 독자와의 소통이겠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배제하고 미적 감각을 포기하면, 독자에게 (등장인물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쓰는 일 외에는 도무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작가. 서랍장 옆에 세워진 기타도 아내의 것이란다. 하지만 요즘 그가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살림. 직장에 나가는 여자 친구(이기호는 아내를 `여자 친구`라 칭한다 - 관련기사 참조)를 대신해 청소와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역시나 ‘잘’ 하진 못한단다.

작가가 직접 쓸고 닦은 공간을, 다시 글로 채워나가는 과정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문학과지성사. 2004)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가 그러했듯, 앞으로 매해 10월엔 책을 내고 싶다는 이기호. 내년 가을엔 그의 집필실에서 어떤 작품이 ‘수확’ 될까,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관련 기사 ‘이기호 인터뷰’ 보기)

[북데일리 고아라 기자] rsu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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