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크’ 혹은 담배연기 같은 일상
‘스모크’ 혹은 담배연기 같은 일상
  • 북데일리
  • 승인 2005.08.11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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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혹은 담배연기 같은 일상

시방 담배는 위험한 물건이다. 코미디의 황제 고 이주일 씨는 죽기 전 공익광고에 출연, 담배의 해독을 전혀 우습지 않은 얼굴로 고발했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삼성 이건희 회장도 급작스런 폐암으로 미국까지 가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10년 전에 끊었다지만 담배가 간접 원인이라고 했다.

담배를 ‘인류 공적’으로 삼고 박멸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담뱃값 대폭 인상을 단행하더니 앞으로 더 올릴 것임을 예고했다. 공익광고는 더 세련되어졌다. 이별을 호소하는 화면이 가슴을 쥐어뜯게 한다.

그렇지만 애연가들은 ‘담배의 종말’을 강력히 부정한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벽에 세워놓고 총살을 시키더라도 그들은 죽어가며 담배 한대를 청할지 모른다.

‘담배가게 아저씨’의 특별한 사진기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스모크’(하비 케이틀?윌리엄 허트 주연,1995년)는 뉴욕 거리 모퉁이의 담배 가게 이야기다. 송창식의 노래에 나오는 ‘담배가게 아가씨’가 이쁘다면 이 담배 가게 점원 오기 렌은 평범하면서도 괴짜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사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열린책들, 2001)라는 폴 오스터의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그 소설을 읽은 웨인 왕이 영화화를 제의해 폴 오스터가 시나리오까지 썼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무대인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그 담배 가게에서 인상적인 물건이 하나 있다. 담배도 가게도 아니고 카운터 뒤에 서서 담배를 파는 오기 렌의 사진기다.

담배 가게 점원 오기 렌은 매일 아침 사진을 찍는다. 아침 정각 8시 애틀랜틱 애비뉴와 클린터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정확하게 같은 앵글로만 딱 한 장씩 출근시간의 모습을 찍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진 적이 없다. 심지어는 사진 때문에 휴가도 가지 않는다. 그렇게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담아낸 세월은 무려 14년.

한 장의 사진에서 삼라만상을 본다

그가 사진 찍는 행위는 남이 보기에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무심코 찍어보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들이 모두 다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을 하나하나 시간에 따라 들여다보노라면 사진이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사진 속엔 비 오는 모습이나 추위에 움츠린 남자, 활기찬 주중과 한산한 주말, 안개나 눈보라 속의 인물들이나 다른 옷을 입은 동일인물 등 똑같은 무대 위에 기후와 계절, 비슷한 날씨라도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순서대로 날짜가 매겨진 14년의 일상은 14권의 앨범이 되었다. 사진기의 주인인 오기 렌은 말한다. “나의 작품이야. 내 평생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담배를 사러 온 손님인 폴은 그 사진들 속에서 몇 년 전 강도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난, 살아있을 때의 자신의 아내를 발견한다. 그리고 눈물을 쏟아낸다. 늘 그대로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그리고 일상의 시간을 무자비하게 벗어나버린 비일상의 시간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작은 한 부분이지만 다른 세상에서처럼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 사진 속 작은 모퉁이의 기록을 보면 담배연기 같은 일상에서도 세상사의 전부를 들여다 볼 수 있음을 절감할 수 있다. ‘티끌 속에서 삼라만상을 본다’는 불교의 한 대목이나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본다’는 시인 블레이크의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시간이 채집된 앨범 속 사진들은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는 똑같은 일상의 시간은 과연 무가치한가’라고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묻고 있다. 그래서 매력적인 장소 브루클린 담배 가게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오기 렌을 본 사람은 그의 사진기를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일상의 예술’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담배 연기마저도 감미로운 그곳을 기억하고 있다면. [북데일리 박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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