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슬럼프> 센스넘치는 한국식 작명
<닥터 슬럼프> 센스넘치는 한국식 작명
  • 북데일리
  • 승인 2006.09.0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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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혹시 토리야마 아키라(鳥山 明) 라는 작가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드래곤 볼>의 작가가 아니냐` 라고 대답할것입니다. 1984년부터 일본 집영사의 《점프》에 연재되기 시작한 <드래곤 볼>은 주인공이 상대를 이기면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나는 `계단식 구조` 라는 일본만화 특유의 공식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또한 1988년 우리나라에서 창간된 소년잡지《아이큐점프》에 연재되면서, 일본만화 정식수입의 포문을 열어제낀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토리야마 아키라의 작품을 고작 <드래곤 볼>만으로 설명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작품의 과도한 인기로 작가가 연재의 중압감을 느끼면서 <드래곤 볼>의 후반부는 한계점을 잃어버린 액션으로 뒤범벅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토리야마 아키라 만화의 진수는 그런 액션이 아니라 바로 기발한 상상력에서 만들어내는 유머입니다.

<닥터 슬럼프>는 토리야마 아키라가 <드래곤 볼>을 연재하기 직전에 만든 작품입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5년간 《소년 챔프》에 연재한 순수한 코믹물입니다. 슬럼프 박사가 장난기 심한 성격의 꼬마 로보트 아라레를 만들면서 벌어지는 코믹한 사건들을 담아낸 작품이죠. 이 작품은 <드래곤 볼>처럼 액션에 대한 부담감없이 순수한 슬랩스틱 코미디로 독자를 매혹시킵니다.

<닥터 슬럼프>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80년대 후반, 캐릭터의 이름을 일본원어발음 그대로 쓰는 것이 정서상 어렵던 시기이기에, 작품의 모든 캐릭터는 한국식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주인공인 노리마키 아라레는 `또또`라는 이름으로, 노리마키 센베박사(Dr.슬럼프)는 `공영구박사`로, 박사가 짝사랑하는 아라레의 담임선생님 야마후키 미도리는 `강수연` 선생님으로 각각 번역이 되서 나옵니다. 그 외의 캐릭터들도 `심술이`나 `망통이` 처럼 인물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는 한국식 이름으로 번역되서 나오죠.

특히 재미난 이름이라면 역시 공영구 박사와 강수연 선생님입니다.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80년대 후반의 대중적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명입니다. 천재 발명가이지만, 평소 하는 행동이 어벙하던 슬럼프 박사는 인기 개그맨 심형래씨가 연기한 캐릭터 `영구`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슬럼프 박사의 이상형인 미도리 선생님은 배우 강수연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왔고요. 배우 강수연은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나 <연산군>, <감자>와 같은 사극작품부터, 박중훈과 함께 출연한 <철수와 미미의 청춘 스케치>같은 청춘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와 같은 사회성 짙은 영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던 80년대 후반 최고의 스타배우였죠.

이처럼 우리 나라의 대중매체에서는 이름을 통해 직설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기법이 의외로 자주 사용됩니다. 한글이 다른 언어에 비해 언어유희의 폭이 넓은 언어라는 것이 주된 이유가 되겠죠. 하지만 익숙한 이름을 사용해서 캐릭터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진지한 작품에서는 쉽게 허용되지 않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TV를 통해 방송될 때도 일본어로 된 이름이 그대로 나갈 수 없기에 한국식으로 작명을 하게 됩니다. 최근의 작품들은 유치하다는 이유로 저렇게 극단적으로 성격을 드러내는 이름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죠. 대신에 한자보다는 `나리`나 `아라`와 같은 순 한글이름이 TV용 애니메이션에 많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닥터 슬럼프>의 애니메이션이 TV를 통해 방송될 때도 마찬가지로 국내에 첫 소개된 것과는 또 다른 이름을 쓰게 됩니다. 공영구 박사는 다시 원작의 이름인 슬럼프 박사를 되찾고, 또또(아라레)는 아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강수연(미도리) 선생님은 홍단비 선생님이란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강수연이라는 이름을 그냥 써도 무방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배우 강수연도 국민배우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이제 그 이름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버린 것이죠. 대신에 강수연 선생님도 트렌드에 맞춰서 `단비`라는 예쁜 한글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처음 소개될 당시 `공영구`와 `강수연`으로 대변되는 센스넘치는 작명이 많이 그리워집니다. 최근 일본만화의 한국판에서는 저런 센스를 쉽게 접하는 것이 어려워져서 아쉽습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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