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긴 울림`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작지만 긴 울림`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 북데일리
  • 승인 2006.08.3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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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조용히 좀 해요>(문학동네. 2004),<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내가 전화하는 곳>, 장편 <대성당>까지, 레이몬드 카버의 주요 작품이 속속 우리말로 번역되고 있는 것은 영화 ‘숏컷’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미국영화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사실주의 영화감독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 ‘숏컷’은 알트먼이 레이몬드의 ‘숏컷’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상물이기 때문이다.

알트먼의 ‘숏컷’과 원작인 레이몬드 카버의 ‘숏컷’의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들의 작품을 영상으로 혹은 글로 보고 난 후에 서서히 다가오는 충격을 완충시킬 시간을 감상자(독자)들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것 하나 직접 설명하려 들지 않는 두 작가의 태도를 통해, 글자와 이미지정보로 꽉 차게 된 머리는 그 의미와 감성을 조직화해야하는 과제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문법은 난해하기도 하다. 다층위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를 놓고, 할 수 있는 독자의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작가가 아무 말 없이 다큐멘터리만을 보여줄 때, 그것을 보는 감상자는 우선, 얼떨떨한 기분에 빠진다. "So what?", "What do you really mean by that?" 이런 떨떠름한 반응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다보면, 또 다시 "So what?"을 외치게 되고, 그러면서도 다음 "So what?"을 향해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들이 쌓여 한 권이 앨범으로 정리되면 비로소, 책을 덥거나 영화의 앤드 크래딧까지 본 후에 본격적으로 이미지에 대한 encoding 작업이 시작될 수 있다.

드라이한 문체(영상체)는 늘상 독자의 해석에 무한한 권력을 허락한다. 그것이 x로 읽히든, y로 읽히든, z로 읽히든 작가는 "We don`t care."이다. 작가 역시 독자의 각기 다양한 해석에 "So what?"으로만 반응할 뿐이다. 본격적으로 읽기에 들어가보자.

1. TV 드라마 ‘600만 불의 사나이’를 떠올리게 하는 레이몬드 커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런 사람이 건조한 문체의 글을 쓰는 얼굴이구나’

그렇다면 그가 존경했다면 셔우드 앤더슨도 이런 얼굴이었을지 궁금해진다. 힘입게 날갯짓하는 독수리의 눈썹, 활처럼 긴장감 있게 위쪽을 향해 휜 솟은 이마, 인중에 고집스레 파고든 八자, 다부지게 꼭 다문 입술,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어간 눈동자….그것이 레이몬드 커버의 600만 불짜리 얼굴의 이미지이다.

제재소에서 목공으로, 병원 수위로 일하며 야간 대학에서 문예 창작에 대한 공부를 했다는 쉽지 않았을 굴 깊은 유년, 청년 시절을 보낸 레이몬드는 정작 자신이 작품 속에서 떠드는 것을 철저히 유리시키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어려운 시절을 보상받고 싶어 하지도 않는 철저한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그가 그의 단편집으로 내세운 ‘제발 조용히 좀 해요.’가 이즈음에서 납득이 된다.

그는 훌쩍이며 자신의 고뇌를 이야기하며 동정을 받고자 했던 숱한 사람들을 만나왔을 것이고, 그런 경험을 통해 그들의 나약함에 짜증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만의 글에서 우는 소리는 하지 않으리라고, 또한 아름다움을 보고, 가난한 자가 선망의 눈으로 가진 자의 것을 경탄해주는 빌어먹을 예의 따위로 굽실거리지 않으리라고 이미 습작 중에 다짐에 다짐을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하늘은 아름다운 사람을 먼저 거둔다. 그것이 진리이다. 이 강건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남성은 나이 50이 되던 1988년, 암으로 세상과 작별을 했다. 그것도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말할 겨를조차 없이, 아내의 훌쩍임도 보기 싫었던지, 수면 중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말을 극단적으로 아낀 사람이고, 누군가의 감상 섞인 동정과 연민도 불편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2. 미니멀리즘의 작가, 작은 부분(특징이 되는) 의 반복을 통해, 극소한 부분이 거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군더더기 없는 글쓰기의 작가로서, 그는 자주 소개되어지곤 한다. “산문은 건축이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크 시대가 아니라”는 그의 모토였던 헤밍웨이의 말처럼, 그는 이렇다 할 플롯이나 시간, 공간적 배경에 대한 일체의 설명도 배제하고, 단문으로 묘사한다. 그는 압축의 대가이다.

압축된 파일을 풀어놓았을 때, 그의 글들 속에는 유독 대사가 많이 눈에 들어온다. 다성의 화성을 위해, 그는 일부러 서로 다른 언어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말 그대로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리라.

대사야말로, 작가가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는 것, 혹은 말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하거나 군더더기의 묘사를 붙임으로서 오히려 명징성을 훼손시키는 것을 경계하려는 작가의 노력에 최선을 보여주는 일관된 작품 쓰기가 그의 작가로서의 철저한 장인 정신에 박수를 보내게 한다.

카버가 그려내는 일상은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아내와 섹스를 하면서도, 내일 찾아올 고객과의 일을 떠올리고, 영화 극장에서 젊은 아이들의 태도가 탐탁지 않은 중년들처럼, 주인공들은 영웅적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웃집 사람들인 것이다.

거기에는 늘상 평화로워 보이는 권태만이 존재할 것 같지만, 실상 그의 작품은 그 평화의 이면을 들춰내고 있다. 이웃집 커튼을 들춰내면 그 사람들의 아침 식탁이 보인다. 식탁에서 오가는 세금계산서를 둘러싼 싸움 소리가 들려오고, 침대에서 벌어지는 정사의 신음이 들려오고, 정부와 이야기하는 바람난 유부녀의 교양이 같은 교태 섞인 전화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나의 다락에는 해골이 숨겨있다.” 는 서양 속담처럼, 그는 다락 문을 빼곰히 열어서 그 안에 들어있는 해골의 사연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간섭하기 싫어하는 철저히 개인적 자세를 견지한 채로…. 그처럼 그의 글을 대성당의 무시무시한 소름도 느껴진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대성당의 오르간 소리를 들어본 자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공감할 수 있으리라.

쭉 펼치면, 높은 C 샵이 울리고, 움츠리면 낮은 g음까지 너무나도 다양한 음색이 한 데 어우러져, 기묘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대성당의 오르간 같다. 오르간처럼 후진동이 커다란 울림통이 있다. 그렇게도 건조한 그의 글 속에는 말이다.

3. 자세는 차갑게 그러나 진심은 따듯함으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우리네 아빠들의 자식을 향한 태도와 같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늘 무뚝뚝한 그런 아버지들.

어렵게 자라난 한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진실한 소통을 갈구하면서도, 레이몬드 커버는 어디까지나 강하게 자라길 강요받고 자랐을 오레곤 농촌 출신의 남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다물고 있는 입술처럼 그는 자신의 따듯한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게다가,, 그는 세상을 경계했다. 대체로 어렵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자세처럼 세상에는 그만큼 적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그만큼 경계태세의 독수리 같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에 세상을 향한 적개심이나 분노가 배여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진정으로 갈구한 것은 인간 사이에 포장되지 않은 살 비린내가 나는 소통이다. 모든 진정한 소통은 아픔이 전제된다. 어머니와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첼리스트 지망생 소녀가 어머니와의 소통 부재를 괴로워하면 자살을 시도한 것이나, 의사 남편과의 진정한 이해를 희망했음에도, 늘상 그 앞에서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 그들의 아들 앞에서는 완벽한 엄마의 모습만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중산층 아내들의 진실한 소통에 대한 갈증이 무덤덤하지만, 한 편의 소리 없는 단편영화처럼 ‘짠한`

아픔으로 읽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버리는 것은 바로, 그의 글은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 잔잔히 흐르고 있는 물처럼 늘 소통되기를 원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 같다.

그렇지만,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음에도 그것을 표현할 줄 모른다. 끝까지,,,,끝까지 함구하고 죽은 이가 아니던가…. 그런 그의 작품에서도 결말은 늘 열려있다. 해피 엔딩을 기대하고 있음직할 것이라 기대되는 이 작가의 휴머니즘이 그래서 더 설득력 있다면 너무 한 억지일까? 하지만, 어둠 속에 잡은 그대의 차디 찬 손…. 이 어찌 어루만져 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을 통해 레이먼드 커버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의 작품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올 초에 그의 단편집 두 권을 읽게 되었다. 당시에도 하루에 두 편이상은 결코 읽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아주 안단테로….. 그래야지만, 그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하는 일상의 비의를 놓치지 않을 듯싶었기에... 다시금 읽게 된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통해 속삭이는 작가의 낮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나는 또 다시 느리게 책장을 넘긴다. 정말 멋진 단편이다. 현대 단편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북데일리 시민기자 김영욱] syl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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