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지금은 어디서 달리고 있을까
김애란, 지금은 어디서 달리고 있을까
  • 북데일리
  • 승인 2006.08.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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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의 첫인상

표지. 털이 숭숭 난 한 남자가 형광색 분홍 팬티를 입고 조각난 달빛을 받으며 지구를 돌고 있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야광 반바지도 입혀드리고, 밑창이 말랑말랑한 운동화도 신겨드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셔츠도 입혀드리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그중 선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중략)"

2005년 한국일보문학상 최연소 수상작가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창비. 2005)의 한 구절이다.

나이 스물여섯. 짧은 호흡, 수미상응의 작법, 군더더기 없는 경쾌한 문장,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 쿨함. 그런 수사로 그녀의 단편들을 수식하면 어떨까? 나는 그랬다. 그녀의 단편들을 읽는 동안, 그녀가 세상과 화해하는 자세를 통해 세상을 미워하기 보다는 끌어안으려고 하고, 슬픔을 알게 해준 상대를 원망하기 보다는 상대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질질 끄는 문체로, 화려한 수식어로, 한 말 또 하고 또 하기를 거듭하는, 한국의 문학 시장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되는 여성 작단의 문장에 질린 나에게 그녀, 김애란의 글들은 너무나도 신성한 충격 그 자체였고, 한 방 맞은 듯 헤헤 웃음이 나왔다.

2. 치열한 글쓰기, 쓰기 위해 준비했던 그 숱한 시간들

우리가, 아니 최소한 내가 기다려온 작가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등장한 이 작가는 그러나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케이스는 결코 아니다. 꾸준히 수업 중간 중간에 습작을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문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니까. 잠깐 그녀의 소설 쓰기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 <종이 물고기>를 인용하도록 하자.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모든 벽면은 바깥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 다시 원상태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다섯 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들은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것은 더욱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 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옆에 붙어 있는 듯 한 기분도 느꼈고, 반대로 자신이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그는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알 수 없었다.(...중략...) 마지막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면 물고기가 싱싱한 등허리를 파닥거리며 자신을 데리고 어딘가로 헤엄쳐갈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얼마 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는 소설 속의 `그`라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글쓰기가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옥탑 방에서 한 쪽 벽면부터 기초부터 갈고 닦았을 글쓰기는 그녀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가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눈치 챌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대로라면, 처음부터 글을 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기초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한 쪽 벽에 자신이 읽었던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고 그것들로 극 벽면을 채운다. 이것이 일단계이다. 그런 후, 자신이 삶의 기록을 포스트잇에 적어 다른 한 쪽 벽을 채운다. 그리고 나서, 그저 스치는 생각이나 단어 문장을 암호처럼 적어 세 번째 벽면을 채운다.

포스트잇에 암호를 기록하는 일로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그는 공사장에 막일을 나가고, 그곳에서 인부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주어들은 이야기들을 다시 포스트잇에 옮기면서 네 번째 벽을 채운다. 이제 천장과 방바닥을 제외한 면들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닥거리면서 그로 하여금, 헤엄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6 x 8 의 포스트잇이 질서 정연하게 붙여 있는 네 벽면은 커다란 체스판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시간이라는 X축과 공간이라는 Y축을 가진 사건 그래프처럼 보이기도 했다."(p.214) 이 구절은 주인공에게 보였을 자신의 문학적 토양에 대한 자각의 묘사임과 동시에,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지, 그 때까지의 과정을 회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소설 쓰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음을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이다. 헤엄칠 물고기가 되기까지, 그저 작가란 명예를 동경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막연히 끄적이듯 습작만 해왔던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보고, 듣고, 옮기고, 쓰는 과정이 벽면을 채워가는 포스트잇에 비유되었다.

마지막 남은 면인 천장에는 비로소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로 채워진다. 이제야 김애란, 그녀가 작가다운 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무작위로 떼어낸 포스트잇을 연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하나의 포스트잇에 또 다른 의미의 문장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그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신의 소설의 한 구절을 고치느니 버리고 싶은 충동에 무수히 희망을 포기하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3. 작가는 성(性)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녀의 단편들을 몇 편 보고 있노라면, 대체로 그녀가 주인공에게 특정한 성이나 성정체성을 부여하지 않고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80년생, 그러니까 우리나이로 이 소설집이 묶여 발표되었을 때, 그녀는 가장 여성성을 표출하고 싶어지는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의 여성성이 소설 속에 끼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원천봉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여성적인 감수성을 억제하고, 보편적 이야기로 책 속의 담론들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 점이 기존의 지나치게 수려한 미사어구로 치장이 된 여성작가들의 작풍과는 그녀의 작품을 구별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글은 결코 드라이하지 않다. 오월 순풍에 널어놓은 하얀 이불보처럼 뽀송뽀송한 느낌의 햇살 냄새가 스며드는 것은 어찌 가능한 일일까?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그녀의 글쓰기 전략이고, 무던히도 노력했을 그녀의 문학적 수고에서 비롯된 것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바로 그 노력의 성과물이 "형용사와 부사"로 대표되는 수식을 도려내는 일이였다. 물론 용업적 문체나 체언적 문체 어느 한 쪽으로 그녀의 문장을 분류해놓기는 때 이른 감이 든다.

`많은 여성작가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작품 속에서 드러내는 편인데, 작품 속 화자 내지 주인공 성별이 결정적 단어가 나오지 않는 한 독자가 잘 알아채지 못하게 한 것에는 무슨 의도가 있는가?` 라는 YES 24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여성보다는 인간에 주력하고자 했거든요."

그녀의 말을 통해 볼 때, 김애란이란 어린 작가는 아마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지문을 던졌음이 분명하다. 여성성의 문제는 그녀에게는 지난 세대의 낡은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여자로 살아가느냐, 남자로 살아가느냐의 문제 보다는 세상 속에 던져진 한 인간의 뿌리, 그 원형을 추적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다.

4. `아버지` 그 상징성을 회의하다.

그녀의 말대로(YES24 인터뷰) 많은 이야기들 속에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이유는 어머니가 항상 여기 있기 때문이라는 조셉 캠벨의 이야기가 그녀의 소설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생물학적 기원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무의식과 관련된 징후로서의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그녀의 소설들은 아버지를 한 곳에 정주할 수 없는 유목민으로 설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현재 여기 없거나, 설령 있더라 하더라도 튼실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데, 이곳에서 저 곳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존재이거나, 설령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들(딸)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이 그저 그 자리만 지키는 존재일 따름이다.

아버지를 묻는 그녀의 소설로는 <스카이 콩콩> <사랑의 인사> <달려라 아비>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등이 있다.

"아버지는 누운 채 불빛을 세례 받는다. 펑! 펑! 활짝 피는 불꽃들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거대한 성기에서 나온 불꽃들이 민들레 씨처럼 밤하늘로 퍼져나갔을 때, 아버지의 반짝이는 씨앗들이 고독한 우주로 멀리멀리 방사되었을 때 "바로 그 때 네가 태어난 거란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살펴보아도 그녀 김애란에게 아버지란 이름에 내재된 것은, 아버지라고 대변되는 이 시대의 숱한 아버지들이 설 땅을 잃어가는 현실에 대한 깨달음 때문일 수도 있을 듯 하다. 물론 그녀는 그 책임을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에게 묻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그 책임을 봉건적 사회 윤리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다시 뛸 수 있고, 그리고서도 또 될 수 있는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신화적인 아버지의 상징적 해석을 믿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여야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그런 신화의 시대는 그녀에게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녀가 택한(만든) 신화는 아버지의 부재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자리 잡지 않도록 아버지를 희화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상처 입은 여성으로 늘 항상 피해의식에 시달려온 기존의 여성 작가들과 그녀를 구별해 주는 또 다른 하나의 그녀만의 이점이자 한국 문단의 페미니즘의 종결을 알려주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사실 구체적으로 남성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개인적 경험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되는가? 대체로 자신의 애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조건에 맞춰 결혼하고(결혼 문제만큼은 아직도 남성 주도적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대체로 여성이 남자를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의 날개 아래 보금자리를 꿈꾸지 않는가?

그리고 사회적 거대 담론으로서의 페미니즘의 피해자라고 자신을 들들 볶는다. 그렇지만, 진정 사회 속에서 남성들과 경쟁하면서- 남성(아버지와 남편)이 퍼 다주는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 거칠게 물어뜯고 보복당하고 그들의 힘자랑에 링 밖으로 나자빠진 경험을 한 사람은 솔직히 30대 이후에는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분명 우리의 20대 여자들은 어딘가 많이 바뀌었다. 물론 20대 남자들도 많이 바뀌었다. 슬프게도 경제 논리가 그들의 가치관을 바꾸어놓았다고는 하지만, 여성들도 당연하게 사회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남자들 또한 자신의 부인이 경제력을 갖추어 주길 바란다.(물론 이 때 남성들이 바라는 것은 여성의 사회적 독립성이 아니라, 경제적 품앗이이다)

원인이야 불쾌하다 하여도, 20대의 여성들의 현주소가 그렇기 때문에 사실 김애란이 전에 없던 아버지의 원형을 찾고자 끊임없이 변주하는 소설의 담론은 그녀 개인이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라고는 칭찬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라는 링에서 레슬링을 하기 위해, 챔피온쉽까지는 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결승전까지 도달해야할 사회적 원형 없이 태어났던 시대적 착오에 대한 자각이고, 누구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그 원형(아버지라는 이름)의 원형을 이제야 딸들이 묻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5. 타자화 된 주체

지금껏 아무도 묻지 않았던 `아버지`를 여성 작가가 물은 것을 남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기성세대의 여성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파격적인 것인 것도 아닌데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고 나를 야단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타자화하고, 타자화 된 내면성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김애란이 그래서 반갑고도 무섭다. 정말 내게는 무서운 신예이다.(물론 내가 소설가 지망자는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타자화 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세상과 만나게 되는지를 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지적 3인칭 시점의 소설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들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자신을 타자화 시키지 못했던 기성 여성 작가들의 한계 때문이라면, 분명 그녀, 김애란의 첫 출발은 그 한계를 의도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훌쩍 넘어선 색다른 출발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은 소설 쓰기를 즐긴다고, 하지만 그녀는 직업이 되면, 직업이기 때문에 소설 쓰기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평소에 치과 의사로 일하다 올림픽이 되면 육상 선수로 출전하는 사람처럼 그녀도 직장을 다니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것이 더 건전해보이고, 경험이란 것은 책을 통해 얻을 수도, 취재를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긴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더 진실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지금의 소신대로 겸업 작가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어디 국내의 소설계가 그리 녹녹한가?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의 문재에 대한 새로움을 갈망하는 그녀의 노력이다.

어린 나이에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문단의 시샘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위로한다. "매끈하게 잘 썼지만, 담고 있는 주제가 평범한 것이 되는 것 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담고 있는 주제가 설득력이 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문단의 비평가들의 계속되는 찬사에 거만해져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있다.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 콩콩을 타는 나의 모습은 고독하고 , 또 우아했다. 스카이 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 들어 있었다."<스카이 콩콩>

어떤 정신을 담아내는 큰 그릇으로 거듭 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내게는 너무나 예쁜 그녀가 부디 내 욕망까지 대리로 만족시켜 주었으면 참 좋겠다.

(사진 = 소설가 김애란, 창비 제공) [북데일리 김영욱 시민기자] syl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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