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가 日 적장과 결혼? 역사왜곡 황당
논개가 日 적장과 결혼? 역사왜곡 황당
  • 북데일리
  • 승인 2005.07.26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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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朱). 전북 장수(長水) 출생.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 네이버 `논개` 정보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 적장을 안고 물속에 뛰어들었다`는 역사기록 때문에 유명한 논개. 그러나 그의 이전 기록은 베일에 쌓여있다. `기생`이라고 하는가 하면 최경회 장군의 `소실`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케이블방송 휴먼TV는 지난 20일 `역사극장`을 통해 논개를 아주 적극적인 여성으로 묘사했다. 왜란이 벌어지자 최경회와 함께 싸우기 위해 남장을 하고 홀로 길을 떠나는가 하면 진주성에서 부녀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극중에서 부녀자들을 모아 돌을 나르게 하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역사극장`은 역사 기록을 근거로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로 실제 논개 모습을 알 수 없다.

역사적 인물 `논개`에 대한 사실 여부는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다.

향토사학자 추경화씨는 "최경회가 선조 10년(1577)에 장수 현감이었을 때 논개는 4세 어린아이였다"며 `최경회 소실설`을 꼬집었고, 향토사학자 조중화씨 역시 "진주성 함락 당시 경상 우병사는 조대곤으로 밝혀졌다"며 `전투 당시 논개가 경상 우병사 최경회`와 함께 있었다는 내용이 맞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게다가 책 `이순신의 두 얼굴`(2004. 창해)에 따르면 많은 일본인들은 논개가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연인으로 일본까지 따라가서 자식을 낳고 산 줄로 알고 있다고 한다.

저자 김태훈씨는 "1910년 이후 소위 일본의 극우 학자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영웅성을 부각하다 보니 그의 부장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치욕스런 부분을 왜곡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또 일본 후쿠오카 이즈카시 히코산의 개인사당인 보수원에서는 케야무라의 후손으로 알려진 일본인 우에츠카 히로요우가 논개의 기개와 정절을 흠모하여 영정과 비를 모셔두고 70년대말부터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게다가 일본 사람들은 게야무라 로쿠스케와 나란히 세워놓은 그 비 앞에서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빌면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우에츠카는 70년대부터 논개 사당 건립을 추진해왔고, 한국으로 건너와 진주와 장수 등지를 돌며 남강에서 모래를 가져다 일본에 논개 사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논개정신선양회 김진영 회장은 "2000년 8월 전북 장수군의 당시 김상두 군수가 일본을 방문, 우에츠카와 협의를 거쳐 논개 영정을 갖고 왔다."며 "현재 보수원에 있는 논개의 비는 묘지를 대신한다는 의미이므로 꾸준히 반환문제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최경회 장군의 후손인 해주 최씨 광주?전남 화순군 종회 역시 98년부터 논개의 영혼을 반환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 = 1. 논개의 영정 2. 난이 평정된 후 논개를 기려 `의기`라 하고 강가에 사당을 세워 제를 지내고 그 바위를 `의기암` 이라고 이름하여 `일대장강 천추의열` 이라는 여덟 자를 새겨 두었다.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기녀가 강에 떨어진 것을 낙화에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www.jinjunongae.com)[북데일리 김대홍 기자] paranthin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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