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조금 팔려 이익이 나니까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만든 이건희의 '위기 경영'
“반도체가 조금 팔려 이익이 나니까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만든 이건희의 '위기 경영'
  • 최창민 기자
  • 승인 2020.10.26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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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최창민 기자]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

고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33년 전인 지난 1987년, 만 45세에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이 같은 포부를 드러냈고 이를 증명했다. 삼성이 시가총액 1조원에서 396조원에 달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면서다. 당시 그가 밝혔던 이 외마디 메아리는 현실이 됐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삼성은 이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2018년 기준 매출 386조원을 달성했다.
 
세계가 놀란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고인의 약속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삼성 관계자는 말한다.

1987년 회장 취임식 (사진=삼성)
1987년 회장 취임식 (사진=삼성)

■ “사재를 보태겠다”…반도체 승부수

삼성이 IT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에 투신한다고 밝혔을 때, 그 누구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한 정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1974년 한국반도체가 설립되면서 국내에서도 반도체 웨이퍼 가공생산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반도체는 불과 2개월여 만에 자금난에 봉착한다. 같은 해 12월, 이건희 회장은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재까지 출현하면서 한국반도체 인수를 단행했다. 이를 두고 일본의 한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당시 '1차 오일쇼크' 여파로 페어차일드, 인텔, 내쇼널 등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구조조정과 감산에 나서는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나?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한다. 내 사재를 보태겠다.”
 
이후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바이트(MB) D램 생산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세계 최초로 64MB D램 개발에 성공한 삼성은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 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했고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떠오른 것이다.
 
■ ‘애니콜 신화’에서 ‘갤럭시 신화’까지

고 이건희 회장의 선견지명은 반도체 산업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회장은 반도체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를 이루며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삼성전자는 1988년 국내외에서 모토로라가 장악한 휴대전화 시장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휴대전화인 ‘애니콜’을 선보였다. 이 회장은 당시 “반드시 한 명당 한 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휴대전화를 미래 먹거리로 선정한 이유다.

사진=연합뉴스
삼성 애니콜(좌)과 1997년 5월12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충분한 시험을 거치지 않은 섣부른 출시로 인해 불량률은 11.8%에 달했고, 애니콜을 판매한 대리점 사장이 불량품을 팔았다는 이유로 구매자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 회장은 이에 격노해 휴대전화를 모조리 불태우는 이른바 ‘화형식’을 진행한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열린 이 화형식에서 2000여명의 삼성전자 직원들은 15만여대의 휴대전화를 불태우는 한편, 품질확보라는 결연을 다졌다. 이날 잿더미로 변한 휴대전화의 값은 500여억원에 달한다.

이후 삼성전자는 1995년 8월 마침내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을 달성하면서 정상에 올라섰다.

■ 1000만대 팔린 ‘이건희 폰’…디자인 혁명의 산물

고 이건희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올해를 그룹 전 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자”라면서 이 같은 포부를 드러냈다.
 
6년 뒤인 2002년 4월, 혁신적인 디자인의 휴대폰 ‘SGH-T100’을 출시했다. 이 회장은 제품 개발 단계부터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다. 잡기 쉽게 넓으면서도 가볍고 얇은 디자인을 제안하면서다. 그렇게 탄생한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 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1000만대가 팔려 ‘텐밀리언셀러 폰’으로 등극했다

사진=삼성디스플레이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삼성디스플레이 홈페이지 갈무리

이에 힘입은 이 회장은 2005년, 디자인의 격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사장단을 소집해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라고 평가하면서 글로벌 초일류를 다시 한번 주문했다. 이 회장은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면서 사장들을 채찍질 했다.

이 회장은 삼성의 '밀라노 4대 디자인 전략'을 통해 독창적 디자인과 사용자인터페이스(UI) 아이덴티티 구축, 디자인 우수 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 1996년에 이은 ‘제2 디자인 혁명’을 선언한 것이다.

이후 이듬해 출시된 와인잔 형상의 보르도TV는 2006년 한 해에만 300만대가 판매되는 등 세계 TV시장의 판도를 뒤집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를 통해 ‘디자인 삼성’이 다시 한 번 벽을 뛰어넘은 역사로 남았다.

이는 갤럭시 신화로 이어졌고, 2008년 출시한 ‘옴니아’를 시작으로 2011년 애플을 1000만대라는 월등한 판매량 차이로 따돌리면서 업계 1위를 달성했다. 당시 판매량 차이가 200~300만대에 불과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를 보인 것이다.

■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라”…신경영 선언

이처럼 삼성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이 회장의 전화위복에 능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 성취감에 취하지 않고 항상 위험을 대비하는 전략은 지금의 삼성을 있게 한 업적으로 꼽힌다.

세계 최초로 64MB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한 삼성은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면서 세계 1위로 급성장했다. 당시 세계무대에서 1위를 수성한 삼성은 기쁨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이상하리만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밤잠을 설치며 다가올 위기를 직감했다.
 
그는 1993년 오사카 회의에서 “작년 중순부터 고민하기 시작해 작년 말부터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밖에 잠이 안 왔다”라고 말하며 이 같은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 품질보다 생산량 확보라는 실적에 급급했던 나머지, 일부 직원이 불량 세탁기의 뚜껑을 손으로 깎아 조립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되자, 큰 파문이 일었고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도 제동이 걸렸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의 세계적인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방미 중이었다. 이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판매점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던 중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놓여있는 삼성 TV를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앞선 ‘불량 세탁기 사건’을 보고 받은 이 회장은 모종의 결심을 했고 이후 같은 해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여명을 불러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이 회장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면서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면서 “지금처럼 하면 잘해봐야 1.5류다. 철저히 바꿔라.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하면서 신경영을 선언했고 이를 시작으로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에 달하는 토의를 이어갔다.

사진=삼성
사진=삼성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1996년, 삼성은 연평균 17%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때 이 회장은 또 한 번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다.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하던 중의 일이다.
 
이 회장은 “반도체가 조금 팔려 이익이 나니까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면서 사장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 회장의 질책에 고무된 사장단은 장래 위기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이로써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와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추진했다.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경영 합리화와 사업재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한 것이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 지 1년 후인 1997년, IMF 외환위기나 도래했지만,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이 같은 거센 파도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등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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