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든 시인, 10년째 부치는 편지
지리산에 든 시인, 10년째 부치는 편지
  • 북데일리
  • 승인 2006.04.2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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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고 내몰리며 살다보니/가락, 가락 울며 황새들도 떠나고/내내 황새우울 울화병의 날들이었다//......//저 논에/내 몸과 마음의 염도를 맞추며/벼를 키우던 논물,/ 애간장이 녹아 흐르던/황새우울 눈물의 시간이었다”(이원규 ‘황새울의 꿈’)

지난달 25일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평택시 ‘대추리 평화문예축전’ 행사에 중고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온 이원규 시인이 동네 담벼락에 쓴 시의 일부분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으로 유명한 이원규 시인은 때로는 오토바이로, 때로는 걸어서 생명평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낙동강 1,300리 길, 지리산 850리, 백두대간 1,500리를 걸었으며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등 그는 산 속에 갇혀있기 보다 오늘도 부단히 길 위에 서 있다.

이원규 시인의 산문집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좋은생각.2004))는 시인이 걷는 이유와 자연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악연은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이라는 시인은 생명의 길 위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 지리산자락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

그와 절친한 유용주 시인은 “꽃이나 나무, 산이나 강이나 돌을 비롯하여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인연은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허물고 오래 전부터 한 몸이었다”며 ‘아니 갈 수 없는 그 길’에 호응한다.

시인은 “알차게 속으로 늙는다는 것은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는 상식에 기꺼이 발을 맞추는 것”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무덤으로 가는 길 위에서 조금씩 더 여유롭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냐“며 조심스레 길의 방향을 가늠한다.

“그리하여 봄꽃들이 피면서 북상할 때/꼭 사람의 걸음걸이로 올라가고,/단풍이 남하할 때에도/꼭 사람의 속도로 내려옵니다.”

늘 풍경의 옆모습을 보면서 걷는 그의 걸음걸이 속도 역시 자연의 움직임에 닮아 있다. 꽃이 피는 만큼, 단풍이 물드는 만큼의 빠르기로 세상을 바라본다.

“차라리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이 더 행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보낸 뒤 답장을 기다리던 며칠간은 또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 지요.”

십여 년째 지리산에 입산하여 봄이면 진달래 철쭉 화사한 지리산 편지를 보내오는 시인의 옷자락이 스친 곳에 어김없이 봄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래서 길을 지우며 길을 걷는, 꽃을 피우며 마음 분분한 시절은 행복하다.

(사진=지리산 노고단 운해)[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fargo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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