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도전은 권력지향적이고 속좁은 인물로,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해악을 끼친 인물로 그려졌다. `태조실록`에 "그는 국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였다. 그리고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하였다"고 평가된 부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기획자이자 민중을 위한 혁명가로 그려졌다. 특히 50회 방송에서 "자신의 뜻을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며 의연한 죽음을 맞이한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정도전의 제대로 된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책이 `정도전을 위한 변명`(1997. 푸른역사)이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 조유식 사장이 월간 `말`지 기자로 재직 중일 때 집필됐다. 그를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냉정하게 평가하려는 시각이 돋보인다.
저자는 그런 고민을 다음과 같이 풀어놓고 있다.
"지난 3년간 정도전의 나의 스승이자 선배이자 친구였다. 때로는 그가 품은 이상에 공감하며 가슴 뛰었고, 때로는 그의 눈물에 함께 가슴을 쳤으며, 때로는 그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한 권모술수에 실망하여 책장을 덮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를 위한 변명을 쓰기로 작정한 것을 몸을 사리지 않고 역사에 헌신한 그의 삶에서 진한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책이 흥미로운 점은 고려와 조선을 통해 현대를 본다는 점이다. 또한 고려와 조선에서도 현대와의 공통점을 집어내며 이상화를 경계한다는 점이다. 고려와 조선이 엄청난 신분차별 사회라고 돼 있지만 연좌제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현대 사회보다 낫다.
비록, 정도전이 조선왕조 내내 복권되지 못했던 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진은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고, 손자 문형은 세조 때 우의정, 그 아들 숙지는 이조참판, 그 손자 원준은 성종의 사위가 되었다. 본인은 만고역적이었지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은 조선왕조의 관용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또한 사대부 집안에서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상속했으며, 국가시험에서 서얼출신을 차별하지 않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정치 풍토는 당시 선비들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 않음도 드러난다. 정치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벤트 정치, 가장 친했던 친구와 스승조차에게도 칼을 겨누는 냉혹함, 인신비방이 난무하는 추악한 모습들을 저자는 가감없이 서술한다. 충절과 지조의 상징으로 받들어지는 정몽주도 정적 제거를 위해 거짓정보를 흘리고 불법체포에 나선다. 그러나 개인 감정과 공적인 판단은 잣대가 달라야 한다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이색을 죽이려 하지 않는 정도전은 정도전일 수 없고, 정도전을 죽이려 하지 않는 정몽주 역시 정몽주일 수 없다. 그러한 정도전과 정몽주라면 비록 사제의리와 우정은 지켰을지 몰라도 역사발전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정도전과 정몽주 같은 인간형, 역사는 그들처럼 정치적 선이 분명한 사람들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고려 말기 정도전이 등장할 때부터 정도전이 사망할 때까지 연대순으로 기록됐다. `정도전은 비굴했나` `천민의 피` `삼봉의 신원을 위하여` `일면 사대, 일면 자주의 삼봉식 외교론` 등 목차에서 역사속 삼봉의 모습과 이에 대한 지은이의 반박이 느껴진다. 저자는 당시의 시대상과 태조실록와 태종실록의 비교, 명의 외교문서 등을 통해 정도전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지은이의 고찰속에서 정도전은 조선조 최대의 개혁정치가로 거듭난다. 토지국유제를 주장했던 진보정치인이자, 당대 사대부의 허위의식을 꼬집고 농부를 `은둔군자`로 칭송했던 민본주의자였다. 노비의 신분해방을 주도했고, 말업으로 천시받던 상공업 장려정책을 실시했던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원명교체기의 시대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해 무주공산이던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뛰어난 외교가이자, 고려조의 국교였던 불교를 가장 앞장서 비판해, 새로운 사상의 기틀을 닦았던 혁명적인 사상가였다. 또한 `충(忠)` 대신 `정(正)`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왕권중심주의를 견제했다.
21세때 당시 개혁군주로 인기가 높던 공민왕의 일탈행위를 폭군의 비행에 비겨 신랄하게 꼬집었던 대단한 배포를 가진 선비였으며, 병법과 궁중음악, 헌법, 철학, 종교, 경제, 역사, 지방행정 등에 통달했던 대단한 천재였음도 드러난다.
조선의 헌법전 초안인 `조선경국전`, 역사책 `고려사`, 불교비판서 `불씨잡변`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이후 조선의 헌법전인 `경국대전`의 기초가 된 것으로, 조선왕조가 그의 손에 의해 기획됐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건축과 수도 한양도 바로 그의 작품이다.
조유식은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켰던 정몽주가 태종대에 바로 복권되고 공신칭호까지 내려지는 반면, 자신은 역적으로 몰렸던 사례속에서 왜 정도전이 부정적으로 그려졌는지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왕권강화를 추구했던 이방원에게 왕권주의를 부정했던 정도전보다는 고려왕조에 대한 정절을 지켰던 정몽주가 훨씬 이익이었다는 설명이다.
고려와 조선왕조의 정권교체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왕조교체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고려건국세력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뛰어났는지가 책 곳곳에서 상세히 기술된다. 흔히 정절의 상징으로 숭상받는 정몽주 또한 고려의 재상으로서 치밀한 정치가였음이 드러난다.
그 또한 혁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몰래 암살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30년 동안 가장 가까웠던 동지이자 친구에게도 살해 명령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역사와 개인적 의리 사이에서 저자는 역사를 선택한 인간을 옹호하지만, 이 문제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역사적 발전을 선택한 사람이 후대의 평가를 받아도 문학작품 속에서는 개인적 의리를 지킨 사람이 보다 낭만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북데일리 김대홍 기자] paranthink@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