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향한 욕망과 몰락
예술을 향한 욕망과 몰락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01.27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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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예술가와 그 그림자

 [북데일리] 사는 동안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그 행운의 존재를 우리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같은 분야에 있다면 인생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한데 그 분야의 최고자라면 어떨까. 누군가는 계속 경쟁을 하며 지내겠지만 누군가는 다른 궤도로 수정할 것이다. 예술이라는 장르는 특히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몰락하는 자>(문학동네. 2011)속 화자와 친구가 천재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를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을 포기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글렌 굴드와 만나면서 한 사람의 생이 어떻게 비참하게 몰락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화자의 독백 형식으로 반복적인 문장들로 강조하며 이어진다.

 쉰한 살의 화자는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참여 한 후 친구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별장 근처 여관에 투숙한다. 베르트하이머의 자살이 28년 전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글렌 굴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부유했지만 예술에는 무지했던 가정에서 자란 화자와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의 대가가 되기를 꿈꿨다. 글렌 굴드를 알기 전까지 말이다. 글렌 굴드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고 친구가 되었지만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아노만이 전부였고 글렌 굴드를 의식하는 삶이 전부였던 것이다.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여동생을 괴롭히고 친구인 화자에겐 권태로운 삶을 자살로 마감할 것이라 비아냥거린다.

 첫 눈에 서로를 알아 본 세 명의 친구 중 둘은 죽었고 화자는 살아남았다. 예술과 피아노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았고 나머지 둘은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자는 베르트하이머처럼 자살하지 않았기에 몰락하지 않은 자라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글렌 굴드의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건 가능할 것일까? 만약 글렌 굴드가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다면 베이르트하이머는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것이 불행이든, 패배자든, 몰락하는 자이든 말이다.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식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92쪽

 소설은 글렌 굴드의 등장만으로도 흥미로우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냉소적이고 독단적인 독백의 반복만으로도 충분하게 독자를 이끈다. 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보여준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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