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상처를 어루만지다
밤, 상처를 어루만지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2.11.07 0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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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서울에 사는 스물 둘 여자의 삶

 

[북데일리] <추천>도시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지만 누군가에는 치열하다. 누군가는 밤새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밤을 지켜야 하며 누군가는 밤의 그늘에 속해 숨어버린다. 소설 <우선권은 밤에게>(2012. 작가정신)의 스물 두 살의 주인공에게 밤은 거대한 안식처이자 불안의 공간이다. 

주인공은 미혼모였던 엄마 대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의 재혼으로 잠깐 아빠가 존재했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차례로 죽고 스물 두 살의 나는 서울의 어느 전문대 근처의 한 부동산에 근무한다. 죽은 엄마의 전 남편이 운영하는 곳이다. 나는 매물로 나온 집들을 원하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한다. 1년 넘게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 뚱뚱해진 몸은 계절마다 같은 옷, 같은 신발로 지낸다.

거대한 서울에서 나는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간다. 누군가 남기고 간 먼지 가득한 살림살이,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최신 유행의 원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단순하고 반복된 일상을 보낸다. 다양한 사람들의 속내를 읽는다. 밤은 나에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면의 밤은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밤, 나는 주인을 찾지 못한 집들을 청소하고 집들의 이야기를 듣다 그곳에서 잠들기도 한다. 부동산을 찾은 신입생에게 여러 집을 보여주면서 나는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움츠러들고 두려운 모습을 숨기며 방어하는 자신을 말이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그 외투에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를 덮어 쓰고 밤의 거리를 걷는다. 커다란 주머니에는 언제나 편의점의 음식들. 그것들을 만지작거려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끈적이거나 가슬가슬한 손가락.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까닭인지, 밤의 거대한 반죽에서 떨어져 나온 한 점 부스러기로 보이는 때문인지, 반년쯤 이어진 밤의 산책길에서 내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5쪽

그러다 집을 구하러 온 쌍둥이 여사를 만나면서 달라진다. 숨겨두었던 상처와 슬픔을 조금씩 털어낸다. 외롭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 대해서 말이다. 쌍둥이 여사가 드려주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되는 대로 살아온 삶, 나를 돌보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따끔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인 것이다.

“사람은 잘 먹지 않고 잘 입지 않고 잘 자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잘 살 수는 없어요.” 159쪽

밤이라는 공간은 얼마나 화려한가. 그러나 그곳의 삶이 모두 편안하지는 않을 터. 소설은 집을 보러 다니는 스물 두 살의 여자를 통해 밤을 견디는 다양한 사람들의 상처와 삶을 위로한다. 어둡고 깊은 밤이 지나야 밝고 환한 아침이 오듯 상처를 이겨내고 성장해야 한다고 나직하게 말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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