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①새해 "떨리는 가슴으로 오세요"
송수권①새해 "떨리는 가슴으로 오세요"
  • 북데일리
  • 승인 2006.01.0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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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나무 보굿을 벗겨 내고 가지 사이에 돌 끼우기, 정월 초하룻날 날이 밝기 전에 시험 삼아 하여 보소. 며느리는 잊지 말고 송국주를 걸러라. 온갖 꽃이 만발한 봄에 화전을 안주 삼아 한번 취해 보자.”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중 정월령 일부분이다. 나무껍질을 벗겨 벌레를 ?i고, 돌을 끼워 다산(多産)을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 여기 생의 정월에서 대보름같이 포름한 <여승>(모아드림. 2002)에 수줍게 합장하는 도련님, 송수권의 월령가를 들어 보자.

정월은 이 집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올린 송국주 찌끼를 부엌에서 몰래 먹다가 취해서 부른 노래다. 그릇도 신이 나서 달그락달그락 장단을 맞춘다.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두 줄로 금긋듯/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새해 아침은/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새해 아침은/첫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져 콧노래를 부르듯/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새해 아침’)

이월은 삼동의 지리산 골짝에서 지혜와 방편의 유마경을 읽어야겠다. 궁하면 통할 것이니, 산삼할아버지를 뫼시고 가는 장터길에 힘이 실린다.

“며칠 째 쌓이던 눈이/다시 녹으면서/대성동 마을 움집들의 추녀끝을 둘러/고드름발을 쳤다.//우리 고숙은/삼동내 눈사태 속을 흐르는/물소리도 싫어지고/마른 산약 뿌리를 다듬으며/달장깐이나 막힌 화개장길이 못내 서운타.//지리산을 겉돌면서 살아 온/고숙의 한평생/이 봄은 심메마니 어린 싹이라도 볼까//삼동 허연 꿈속에서도 만나지는 떡애기./아장아장 걸어오는 부리시리 산삼/한 뿌리라도 만나질까./유마경 한 구절 같은 햇빛 하나가//고드름발에 엉기면서/지리산 일대의 산봉우리들을/거느리고 왔다.//산맥들이 풀리면서 돌아가는/엇둘 엇둘 소리......”(‘화개장길’)

봄날이 따뜻해져 만물이 생동하니, 온갖 꽃 피어나고 새소리 갖가지라. 대청 앞 쌍제비 옛집을 찾아오는 삼월인데, 문밖에 살구꽃같이 파리한 여승이 아슴하게 서있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장지문에 구멍을 뚫어/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시를 쓴다.”(‘여승’)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보리 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한 소리 하는 사월이다. 뻐꾹새 울음이 흘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울다 지친 뻐꾹새 영혼이 철쭉으로 幻(환)했다.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울음 울어/떼로 울음 울어/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알아냈다.//지리산 하/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한 울음을 토해내면/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또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알았다.//지리산 중/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지리산 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지리산 뻐꾹새’)

그루갈이 모심기에 제 힘을 빌려야하는 오월이다. 술통을 달고 가는 짐자전거의 길놀이가 신명난다. 술 냄새 맡은 못줄잡이의 등이 자진모리에서 휘모리로 가다 그만, 턱 주저앉는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바퀴살이 술을 튀긴다/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시골길이 술을 마신다/비틀거린다/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주모가 나와 섰다/술통들이 뛰어내린다/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시골길 또는 술통‘)

삼대를 베어 묶어 익게 쪄 벗기어, 고운 삼은 길쌈하고 굵은 삼은 밧줄 꼬는 유월이라. 달빛 아래 초당에서 어머니는 오동꽃 수를 놓고, 나는 당시(唐詩)를 읊으리라.

“어머님 한 땀씩 놓아가는 수틀 속에선/밤새도록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매운 선비 군자란 싹을 내듯/어느새 오동꽃도 시벙글었다/태사신과 꽃신이 달빛을 퍼내는 북계전하/말없이 잠든 초당 한 채/그늘을 친 오동꽃 맑은 향 속에/누가 당음을 소리내어 읽고 있다/그려낸 먹붓 폄을 치듯/고운 색실 먹여 아뀌 틀면/어머님 한삼 소매 끝에 지는 눈물/오동잎새에 막 달이 어린다/한 잎새 미끄러뜨리면 한 잎새 받아올리고/한 잎새 미끄러뜨리면 한 잎새 받아올리고/스르릉스르릉 달도 거문고 소리 낸다/어머님 치마폭엔 한밤내 수부룩히 오동꽃만 쌓이고...”(‘자수’)

밤내 진보라 오동꽃 어머니 수틀에 쌓이고, 오동나무 장롱 속에 든 달이 거문고 소리를 품는다. 아, 초여름 연보라 가지꽃 같은 어머니... (계속)

(사진 = 영화 `비구니` 스틸컷)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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