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영혼을 당장 잡아와'
'그녀의 영혼을 당장 잡아와'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2.07.30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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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면 모두 현실이 되는 소설

[북데일리] 상상에서조차 일어나면 안 될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잔혹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소설이 반갑다. 입과 눈이 손가락에 달려 있는 해괴하고 기묘한 표지가 섬뜩하면서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소설이니까, 상상하는 그 이상의 놀라움을 안겨줄 거라 기대해도 좋지 않은가.

<레몽 뚜 장의 상상발전소>(2012. 자음과모음)는 상상하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 상상은 기준도 제한도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이 되는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세 명의 주인공이 그곳에 모여든다. 평범한 직장인 이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마태수, 인생 역전을 꿈꾸며 성형 중독에 빠진 배우 지망생 홍마리, 번듯한 가장으로 한때 유명한 게임 개발자였지만 현재는 실업자 조가 그들이다. 경제력을 이유로 애인과 헤어진 마태수는 상상 속에서 애인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리고, 홍마리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더라도 오디션에 합격을 원한다. 실직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못한 조는 치과의사인 아내와 딸아이가 사라졌다고 상상한다.

레몽 뚜 장은 세 명을 낯선 공간에서 잠자고 있는 한 여자 '리'에게 데려간다. 그는 세 명에게 그녀의 영혼을 잡아오라고 말한다. 영혼을 찾으러 떠난 곳에서 그들은 자신들과 마주한다. 잊고 싶었던 어린 시절, 상처로 남은 가족들,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모습이다. 아니, 상상인지 현실이지 애매모호하다. 그러니까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줄타기 하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소설은 이제 1995년 영국, 2000년 도쿄, 2011년 파주, 다시 1995년 도쿄, 2011년 서울, 2000년 영국에 이어 2144의 먼 미래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SF영화처럼 다른 시각, 다른 공간, 다른 인물이었지만 그들은 마태수, 홍마리, 조와 다르지 않았다.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는 건 과연 행복한 일일까. 미치도록 원했던 것들을 갖고, 지지부진한 현실에서 벗어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게 과연 행복하고 아름다운 상상뿐일까. 어쩌면 외롭고 버거운 현실을 바꿀 수 없기에 때로 위험하고 불온한 상상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와 닮은 소설 속 누군가처럼 말이다.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지독하게 외로워집니다. 도시를 떠도는 우울과 고독과 긴장된 공기가 나를 보호하고 있는 듯 마음이 편안해지죠. 나처럼 하찮은 인간도 메마른 도시의 일부가 되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습니다. 나 혼자 외롭고 무기력하고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모두들 견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사람들의 굳은 얼굴을 보며 위안을 얻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 도시에서 하루하루 견디는 방법은 그것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두렵고 불길한 일들을 상상하는 것. 나는 오늘도 불길한 상상을 합니다.’ p. 233~234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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