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고 흔적없어 텅 빈 `죽은 시인의 길`
덧없고 흔적없어 텅 빈 `죽은 시인의 길`
  • 북데일리
  • 승인 2005.12.19 0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 고향집 장독대에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음, 실한 놈들은 다 싸 보내고 무지랭이만 겨우 남아도.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에헤 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고향의 정서를 시래기처럼 잘 말린 정태춘의 노래 ‘고향집 가세’ 3연이다. 마지막 연 후렴에서는 소리꾼의 요령과 상여꾼의 뒷소리가 윤중호 시인의 마지막 <고향 길>(문학과지성사. 2005)을 만장처럼 따른다.

어머니 계신 곳에 노오란 수세미꽃이 피었습니다. 오이꽃보다는 크고, 호박꽃보다는 좀 작은 수수한 수세미꽃. 시인은 수세미꽃을 보면서 지나온 길을 더듬어 봅니다.

“외갓집이 있는 구 장터에서 오 리쯤 떨어진 九美집 행랑채에서 어린 아우와 접방살이를 하시던 엄니가, 아플 틈도 없이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이 다 해지게 걸어다녔다는 그 막막한 행상길./입술이 바짝 탄 하루가 터덜터덜 돌아와 잠드는 낮은 집 지붕에는 어정스럽게도 수세미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덧없어, 참 덧없어서 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친 행상길”(‘詩’)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이마을 저마을을 다녔을 테고, 시인은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시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영목에서’)

지금은 흔적 없이 대청호에 잠긴 고향마을, 회인 사십릿길을 회상하며 시인은 홍시처럼 발갛게 취기가 오릅니다.

“개울물 소리 문득 궁금해지면, 漁夫同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 밤길 더듬어 신새벽까지 술에 취해 걸어가던 회인 40리./회인 가는 길엔 감나무가 많았다./아침밥 짓는 연기와 강안개가 다투듯 피어나는 고샅길 따라 척척하게 걸어가면,/... 상여소리 구슬프기도 하고/... 구절초가 사립문을 열어놓구 누구를 기다리는지 한적허구/... 도깨비불도 자최 없이 사라진, 그 회인 40리./....../고샅마다 산비탈마다 길목마다 우멍하게 서서, 맘 좋은 할아버지처럼 해장술에 취혀, 목울대를 떨며 먼첨 타오르던 빨간 홍시감./지금, 대청 물결 속에서 눈뜨고 있을까?/회인 40리.”(‘회인 가는 길’)

그러나 가지마다 호롱불처럼 불 밝혔던 감나무는 스러져가고, 삭정이 같은 감나무에서 일생을 궁구하던 거미 한 마리, 마지막 실을 잣습니다.

“늙은 감나무 가지에 매달려/거미가 내려온다./까맣게 타버린 사지를 부비며/한 줄, 불같은 그리움으로/마른 몸뚱이를 던져놓고/필사적으로 가늠한다,/마지막 길의 길.”(‘거미는 평생 길을 만든다’)

지상에 내려온 거미는 평생을 일구어 허공에 피워놓은 하얀 털실 같은 능금꽃을 바라봅니다. 시인의 발치에 툭 떨어져 쌓여가는 빨갛던 능금을 보면서 이제는 갈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릴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는데/자꾸 달아올라요.//送天江에 꽃 그림자 흘려 보내던/능금꽃 필 때도 그랬어요./어느 날 느닷없이, 봄바람 부풀대로 부풀어/온 천지 꿈틀꿈틀 움터올 때도/쑥국새 소리에 설레었던걸요./밤마다, 먼 곳, 길 떠나는 꿈을 꾸었어요.//가을바람이 거두어가는 것, 아시지요?/....../이젠 가야겠어요./지난 한철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능금-백화산 대래골 능금나무 아래에 소복이 쌓인 채 썩어가는 산능금’)

가을이 저물면 기러기 진즉 떠난 윗말 강어귀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을이니까요.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왜 모르겠어요./잠깐만요. 마지막 저/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무덤 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이.제.됐.습.니.다.”(‘가을’)

시인은 마지막으로 곶감처럼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젖무덤을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그 아득한 길을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오릅니다.

“산딸기가 무리져 익어가는 곳을 알고 있다./찔레 새순을 먹던 산길과/삘기가 지처에 깔린 들길과/장마 진 뒤에, 아침 햇살처럼, 은피라미떼가 거슬러 오르던 물길을/알고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돌아가신 할머니가, 넘실넘실 춤추는 꽃상여 타고 가시던/길, 뒷구리 가는 길, 할아버지 무덤가로 가는 길/....../순한 바람 되어 헉헉대며 오르는 길, 그 길을 따라/....../수줍은 담배꽃 발갛게 달아오르는 길/우리 모두 돌아갈 길/그 길이 참 아득하다.”(‘고향 길1`)

꼬불꼬불한 산비탈을 꽃상여가 망설이며 오릅니다. 언덕을 오르자 상엿소리 달아올랐다가 이내 잦아듭니다. 하늘엔 새하얀 구름 잠시 산위에 머물렀다가 우리가 가야할 ‘고향 길’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덧없고 흔적 없고 이룬 게 없어서 눈물나게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 시인 윤중호는 1956년 충북 영동군 심천에서 태어나 숭전대학교(현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삶의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으로 <본동에 내리는 비> <금강에서> <청산을 부른다> 등이 있다. 2004년 9월 지병의 악화로 영면하였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