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지식] '논리적 영어 VS 감성적 한국어, 왜?' 이어령 '보는 문화VS 듣는 문화'의 차이

2015-11-05     정미경 기자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우리나라의 말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의성․의태어다. 청각적 언어가 풍부하다는 말이다. 외국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청각에 대한 것이 세분화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표 지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통찰력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렴풋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의 글과 말을 통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이어령>(여백. 2014) 중 ‘귀의 문화와 눈의 문화’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그렇다. 귀와 눈을 통해 우리와 서양의 차이를 설파하는 것도 흥미롭다.

“젖먹이 아이는 ‘색색’, 유치원에 다니는 놈은 ‘콜콜’, 아버지와 어머니는 ‘쿨쿨’이다. ‘원자현미경’을 발명해 가지고 큰소리를 치는 서양인들도 숨소리를 가지고서는 그렇게 미분화하질 못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데도 우리는 청각적 이미지를 쓰는 경우가 훨씬 많다.

‘맴맴’ 운다고 해서 ‘매미’란 말이 생겼고, ‘개굴개굴’ 운다고 해서 ‘개구리’란 이름을 만들었다. ‘딱따구리’, ‘부엉이’, ‘뻐꾸기’, ‘뜸부기’, ‘꾀꼬리’, ‘쓰르라미’……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세우(細雨)’란 말도 우리는 그 청각적인 것을 따 ‘보슬비’와 ‘부슬비’로 구별했고, 심지어 현대에 와서는 제트기도 ‘쌕쌕이’라고 한다. 기선이나 화륜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배의 기능을 논리적으로 따져 붙인 것이지만, 우리는 귀에 들리는 대로 ‘통통배’나 ‘똑똑배’라고 해버린다.

영어로 “나는 안다”라고 할 때 “Yes, I see(본다)”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은 주로 시각의 면에서 인생을 이해해 간 사람들이지만, “말 잘 들어라”, “말을 잘 안 듣는다”, “말귀가 어둡다”라고 말하는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사물을 이해해 가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귀 없는 기계를 보고서도 “말을 잘 듣는다”, “안 듣는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박종홍 교수의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이라는 논문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보는 것’은 로고스적인 것이며 ‘듣는 것’은 파토스적인 것이다.

즉 눈의 문화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인 것이며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시인 A. 매클리시는 <도시의 몰락>이라는 그의 라디오극 서문에서, “눈은 리얼리스트다. 눈은 먼저 다음의 것을 보고 그것을 서로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귀는 시인이다. 귀는 믿는다, 창조한다, 그리고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을 그냥 믿어둔다면 눈의 문화는 과학적인 문화며 귀의 문화는 시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p.124~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