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읽고나면 후유증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일 년 반 만에 돌아온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의 서두다. 주인공은 일흔 살의 은퇴한 연쇄살인범 ‘김병수’다. 그는 전직 수의사이자, 지방 문예지에 시가 실린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열여섯 살에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였다. 술만 마시면 엄마와 여동생을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30년 동안 꾸준히 사람을 죽였다‘.
이제 그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거나 최근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그는 알츠하이머(치매) 진단을 받게 되고, 그 때문에 일기를 쓰며 모든 일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제 하나뿐인 딸 ‘은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도 가끔 있다. 은희는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여인의 딸이다.
“단어들이 점점 사라진다. 내 머리는 해삼처럼 변해간다. 구멍이 뚫린다. 미끌거린다.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 아침이면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다 읽고 나면 읽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읽는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필수적인 부품이 몇 개 부족한 기계를 억지로 조립하는 기분이다.” (p.22~p.23)
그가 사는 마을에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어느 날 은희가 사귀는 사람이라며 한 남자를 집에 데려온다. 어디서 본 듯한 그는 연쇄살인범이 분명하다. 그로부터 딸을 지켜야 한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상관하지 않는다. 요즘 내가 마음에 두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은희가 살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이 생의 업, 그리고 연.” (p.28)
그에게는 이제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죽기 전에 바보가 될 테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는 생각한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신은 이미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p.144)
이 책은 149페이지로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얇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일기형식으로 쓰여 있어 앉은 자리에서 술술 읽힌다. 하지만 결말의 반전 때문에 다 읽고 나면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주인공이 읽었던 ‘반야심경’ 속 이야기 처럼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없었고, 그가 체험한 모든 일은 허상이었단 말인가. 독자에게 무척 특이한 경험을 제공하는 소설이다. 가수 이적은 말한다.
“굉장한 파괴력. 단숨에 읽히지만 긴 후유증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