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가 더 이상 시대의 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이용순 & 오만철’전

15일~29일 구구갤러리...‘당대적 오브제’로 끌어올려

2026-09-15     임채연 기자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구구갤러리에서 오늘부터 29일까지 열리는 달항아리가 더 이상 시대의 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조선 백자의 아득한 아우라를 박물관 유리관 속에 가두는 대신, 빛과 신체, 기억이 마찰하는 ‘당대적 오브제’로 끌어올린 현장이다. 전시장 속 덩어리들은 무언가를 역설하지 않고, 그저 거대한 중력처럼 시선을 붙잡는다.

물성은 정직하다. 백토를 빚고 유약을 입혀 불 속에 던져 넣는 일은 작가의 의도와 우연의 거친 악수다. 완벽한 대칭을 살짝 비켜난 둥귐, 가마가 새겨넣은 미세한 흉터와 결은 흠이 아니라 시간의 지문이다. 그래서 이 항아리는 고정된 조형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관람자가 오른쪽으로 두 발자국 옮길 때, 항아리의 곡선은 미묘하게 각도를 틀며 긴장의 결을 바꾼다. 수동적 감상은 사라지고, 우리는 그 시선의 동선을 완성하는 공범(共犯)이 된다.

백색은 칠해진 색이 아니라, 빛과 백토가 호흡하며 빚어내는 현상(現像)이다. 조명에 따라 곡면의 깊이는 옅어지거나 아득해지고, 그림자는 주변의 벽과 바닥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안는다. 그 한가운데엔 ‘비움’이 버티고 있다. 어떤 서사도 강요하지 않는 거대한 공백. 비어 있으므로 오히려 내면의 불필요한 소음들이 스며들어와 고요히 닻을 내린다.

두 작가의 방식은 이 비움의 공기를 각기 다른 각도로 공략한다. 이용순의 둥근 도자가 공간의 한복판을 묵직하게 점유하며 마루의 무게중심을 잡는다면, 벽에서 돌출된 오만철의 도판 달항아리는 평면의 경계를 찢고 나와 빛의 입체감을 벼려낸다. 하나는 딛고 서 있는 대지의 마찰음 같고, 다른 하나는 벽면에 스며드는 빛의 주석 같다.

패스트컬처의 속도감에 멀미를 느낄 때, 이 전시는 속도를 강제로 끄는 브레이크다. 손끝이 닿으면 쏙 들어갈 듯 부드러운 이용순의 백토 기물과, 세월의 겹과 횡금빛을 품어내는 오만철의 도판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멈춰 선다’.

기물은 늙지 않았다. 단지 오늘의 우리를 향해 조용히 몸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리 모두는 그 거대한 침묵 속으로 나이테 같은 발자국 하나를 새겨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