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열 ‘불탄 사과’ 기후재난의 제단이 되다

경북 산불 현장서 피어난 동시대 환경미술 숯덩이 사과- 사과나무의 ‘생태조각정원’ 6월30일까지 뉴욕 제니퍼 방 온라인전시

2026-05-27     임채연 기자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지난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로 기록된 의성·안동 산불은 천년고찰 고운사와 만휴정 원림마저 삼켜버리며 막대한 상실감을 남겼다. 대재난의 현장은 작가 양순열에게 예술가로서의 ‘시대 증언’이라는 소명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안동 농가창고를 작업실 삼아 타버린 사과나무들을 수습해 마당에 세웠다. 그 옆엔 어린사과나무 묘목을 심었다. 열매도 맺지 못하고 초현실적인 숯덩이로 변해버린 오래된 사과나무 등걸이 인류의 자화상 같아 화상을 입은 가지에 붕대를 감았다. 화마를 피해간 사과과수원의 낙과들을 모아 불로구워낸 불탄사과도 창고에 사과더미 같이 쌓았다. 자연스레 작업실 마당과 창고는 그을린 사과나무와 불탄사과가 만들어내는 동시대 환경미술이자 ‘생태적 조각 정원(Ecological Sculpture Garden)’이 됐다.

보통 정원은 생명과 성장, 가꾸어진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양순열의 가든은 불타버린 땅과 죽음의 흔적을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정원의 패러다임을 뒤집는다. 작가가 검게 탄 사과와 나무들을 다시 배열하고 테이블 위에 까지 올려두는 행위는 재난현장을 깊은 ‘사유의 장소’로 전환시킨다. 자연의 억지스러운 복원이 아닌, 상처 자체를 정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되묻는 대지미술의 성격도 지닌다.

미학적으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검은 사과’가 가진 독특한 물질성이다. 광택 없는 검은 표면과 탄화된 질감,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생명과 먹음직스러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는 전통 정물화 속 사과가 가졌던 풍요, 유혹, 생명력, 화려한 색채를 정면으로 전복한다.

불이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물질 안에 응고된 표면은 이른바 ‘연기소성(Smoke Firing) 미학’과 궤를 같이한다. 불은 생명의 형태를 파괴했지만, 동시에 그을음과 탄화라는 새로운 표면을 창조하며 시간 자체를 조각의 형태로 보존해 냈다.

작업실 마당에 조성한 불탄 사과나무 정원은 상실을 어루만지는 의례용 ‘제단’을 연상시키다. 잿빛 땅 위에 서서 이를 돌보는 작가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의 크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파괴된 세계를 묵묵히 수습하는 ‘돌보는 자’의 숭고함을 자아낸다.

양순열 작가의 이번 작업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제창한 ‘사회조각’의 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 작가가 집중하는 것은 미적인 오브제의 생산이 아니다. 불탄 사과나무를 수집하고, 마당에 배열하고, 이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 전체가 인간의 행위와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환경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조각적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불탄 사과나무 가든이 주는 미학적 핵심은 희망적인 복원의 찬가가 아니다. 상실과 폐허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재가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도 끝내 존재의 흔적을 수습하며 이름을 불러주려는 인간의 태도 그 자체다. 완벽한 풍경 대신 무너진 자연 앞에서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양순열의 조용한 의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묵직한 울림을 준다.

특히 이번 안동에서의 작업 과정은 뉴욕 큐레토리얼 플랫폼 JENNIFER BAAHNG의 온라인 전시 ‘WE ARE THE LAND’에서 ‘Forbidden Fruits(금단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6월30일까지 소개된다. 제니퍼 방 온라인 전시 주소는 https://www.baahng.com/we-are-the-land이다.

JENNIFER BAAHNG 갤러리는 양순열 작가의 회화와 조각작품도 오프라인 전시를 열 예정이다. 또 오는 9월엔 베니스비엔날레 독립병행전시에서 작가의 신작들이 집중 소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