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끝에서 마주한 ‘절대의 큰 바다’...장은경 화백 ‘화가의 전원일기’

30년간 양평작업실에서 길어 올린 생각들 책으로 펴내

2026-05-16     임채연 기자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양평의 새벽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하다. 하지만 화폭 앞에 선 내 안에서는 날선 전쟁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전원의 평화로움을 말하지만, 나에게 이 공간은 매일 아침 '가시적인 대상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격렬하게 싸우는 형벌의 장소이기도 하다.”

장은경 화백이 지난 30년간 양평작업실에서 길어 올린 생각들은 엮은 책 ‘화가의 전원일기’을 최근 펴냈다.

화백에게 대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말처럼 우아한 유희가 아니다. 익숙한 형태를 지워내고 무극(無極)의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은, 살을 도려내듯 뼈아픈 고독을 수반한다.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이는 안료들은 실은 창작의 고통이 굳어버린 흔적들이다. 절대 해방과 절대 자유라는 그 눈부신 빛에 닿기 위해, 그는 매일 밤 절망의 심해를 헤엄쳐야만 했다.

때때로 붓을 꺾고 싶을 만큼 막막한 어둠 속에서, 그는 비로소 '관음(觀音)'의 경지를 구걸한다. 들리지 않는 절대의 소리를 눈으로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코가 아닌 귀로 향기를 느끼려는 '문향(聞香)'의 시도는 실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이 감각의 전복은 화가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숙명이자, 본질에 닿으려는 초월의 미학이다.

창작의 고통이 극에 달해 온몸이 타들어 갈 때쯤, 역설적으로 '절대의 큰 바다'는 그 형태 없는 얼굴을 내비친다. 그 찰나의 자유를 위해 그는 다시 고뇌라는 이름의 멍에를 짊어진다.

책의 이야기들은 양평의 맑은 공기 속에서 빚어낸 평온한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요를 찢고 나오려 했던 한 예술가의 비명이자,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했던 고통의 기록들이다. 부디 화폭들 앞에 선 이들이 그의 고뇌를 통해 각자의 자유를 발견하기를, 그리고 눈으로 침묵의 비명을 듣고 귀로 보이지 않는 향기를 맡는 그 고통스러운 환희를 함께 나누길 그는 바란다.

양평의 새벽은 안개로부터 시작된다. 남한강을 따라 밀려온 물안개가 작업실 앞뜰의 나무와 산기슭을 지울 때, 그는 비로소 안도한다. 가시적인 대상들이 형체를 잃고 흐릿해지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대상의 노예노릇'에서 벗어나는 가장 순수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안개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무극의 공간'에는 형태 없는 큰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 그는 그 절대적인 해방의 공간 속으로 붓을 밀어 넣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장 화백에게 양평에서의 삶은 감각의 경계를 허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산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화폭 위의 겹겹이 쌓인 색채로 보일 때가 있다. 저 절대의 소리를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관음'의 순간, 캔버스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는 어느 해 질 녘,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실린 흙내음을 가만히 귀로 들어본다. 코가 아닌 귀로 향기를 느껴야 하는 '문향'의 경지다. 화가인 그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초월의 미학이다. 양평의 사계절이 선사하는 이 신비로운 교감은 그를 대상의 재현이라는 좁은 틀에서 끄집어내어, 절대 자유의 광야로 인도한다.

그의 작업은 양평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풍경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우주의 기운과, 감각의 전복을 통해 얻은 찰나의 깨달음을 기록하는 일이다. 캔버스 위에 남겨진 흔적들은 그가 무극의 공간에서 길어 올린 자유의 파편들이다.

화백은 책 속에서 사람들에게 잠시 가시적인 것들의 소란함을 내려놓기를 바란다. 한 순간만이라도 눈으로 침묵의 소리를 듣고, 귀로 보이지 않는 향기를 맡으며, 각자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절대의 큰 바다'를 마주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