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포로수용소 때문에...날벼락 맞은 소개민의 삶
수필가 김준선, 책 '나는 소개민이었습니다'에 담아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1950년 한국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역사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로인해 강제로 이주 당했던 거제 주민(소개민)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의 역사를 추적한 책 <나는 소개민이었습니다>의 저자 김준선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아름답고 따뜻한,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던 내 고향 거제도.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다 갖춘 이곳에 1951년 2월 전쟁포로라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 17만 3천 명이 밀려들어 왔다. 당시 거제도 인구는 약 10만 명.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이곳은 전쟁과 아무 상관없는 곳이었다.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식수, 남해 바다가 있는 사람 살기 좋은 땅, 거제 원주민들의 삶은 편안했다.
이곳이 포로수용소로 선택되었다. 자연조건과 전쟁과 거리가 멀며, 지리적으로 탈출이 힘든 섬이라서 포로를 수용하기 좋은 조건 때문이다.
포로수용소가 폐쇄된 1954년까지 3년의 시간 동안 원주민인 우리는 소개민이 되어 생존의 전쟁을 겪어내야 했다. 나는 625 전쟁 때 만 세 살이 채 안된 어린아이였고 1952년 엄마 등에 업혀 미군 트럭을 타고 살던 집을 떠났었다. 이 시기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그러나 소개민이라는 특별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어른 들에겐 전쟁 때의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지난한 시간이었다. 전쟁이나 군사작전 등으로 살던 곳을 떠나 군인들이 정해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는 소개(開)는 사람이 살면서 겪지말아야 할 가장 힘든 삶의 경험이다.
남쪽 끝 섬인 이곳 거제도에 전쟁포로가 밀려올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군대는 전쟁 중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원주민들에게 인정사정없이 가혹했다.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갑자기 살던 집에서 쫓겨나 군인들이 쳐준 엉성한 군 •용 천막에서 포로들이 돌아갈 때까지 3년을 살아내야 했다. 인 권도 사람에 대한 존중도 예고도 없었다. 어느날 군인들이 마이크를 통해 고향을 떠나라는 방송을 했고 졸지에 내린 군대의 명령으로 입고 있던 옷에 간단한 살림도구 몇 개만 챙겨서 급하게 군용트럭에 실려서 집을 떠나야 했다. 들판에 다익은 식량도 가져가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국가는 훗날 포로들이 떠나고 황무지가 된 포로수용소 부지, 원주민 농토도 복구해 주지 않았고 장비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상상을 초월한 인권유린이겠지만 그때의 원주민들은 국가나 군대가 하라는 대로 따르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많은 재산 상의 손실을 입었어도 항의할 줄도 따질 줄도 모르는 순한 사람들.
올곧고 자존심 강하시고 마음 여리신 나의 할아버지는 무섭고 잔혹한 세상을 견뎌내시지 못하시고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소개민 생활 1년여 만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 글을 쓰면서 조부모님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여러 번 흘렸다. 어려서 몰랐던 어른들의 고난과 한(恨)을 사무치게 느끼면서 몇 번이나 심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글쓰기가 힘들 때는 고향을 찾아 고향 바다에 안겼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70대와 80대 원주민만이 그 아팠던 소개민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포로수용소를 경험했던 그때의 어른들은 다 떠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는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기억은 기록보다 훨씬 더 강하고 깊지만 기억의 시간은 짧다.
당시 소개민들의 삶의 기록은 본 적이 없고 포로에 관한 남겨진 기록도 찾기 힘들었다. 거제시 발행 거제도 포로수용소 2020년 6·25 70주년 기념 특집 <경남 향토사 논총>,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존 리치의 <전쟁 현장 화보 칼라로 보는 한국 전쟁>, 서울대 박태균 교수님의 한국전쟁 도날드 케이건 교수 의 <전쟁과 인간> 등의 책을 참고했으나 자료에 없는 전쟁의 역사가 너무 많았다.
국립전쟁기념관에서도 포로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다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내겐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이라서 어른들께 들었던 간접경험이 대부분이지만 포로수용소로 인해 소개민으로 살아야 했던 거제도 소개민들의 삶을 꼭 써야 했다. 나는 나의 영혼을 다 실어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포로수용소는 1954년 1월 폐쇄되었다. 우리 동네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가장 악질 76, 77부대의 공산 포로들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체결로 1953년 8~9월 판문점을 통해 그들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포로가 떠난 몇 달 동안 포로에 관한 기록이나 포로에 관한 중요한 모든 서류는 미국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미군들이 전쟁포로를 관리했고 국군은 보조역할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그때의 우리나라는 그 전쟁의 기록들을 보관할 힘이 없었다.
전쟁의 상처는 3대까지 간다고 하는데 거의 마지막 소개민인 나는 소개민과 포로와 전쟁의 시간을 내 일생의 기록으로 최선을 다해 쓰고 남기려 노력했다. 미흡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내내 번뇌와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전쟁은 기억조차 아스라하지만 그 상처는 잊혀질 수 없는 기억으로 여전히 가슴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 소개민들의 아픔을 나누고, 미완의 역사 한 페이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김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