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타오른 꽃파도 타고 삶이 춤추다
보름달이 이울기 시작하자, 사람이 되고 싶은 새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찢는다. 음력 스무날이 되면, 새는 사람으로 변장하여 지상에 내려온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인 것이 하현달처럼 인간들의 어깨위를 선회한다. <춤>(창비.2005)의 대가 박형준 시인이다.
춤의 3요소는 빛과 꽃과 새이리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빛은 어둠의 빛이다. 달빛을 받으면 꿈틀대는 달맞이꽃처럼, 시인은 저녁꽃밭의 살내음을 본능적으로 맡는다.
“밥 짓는 연기여/살 타는 냄새가 난다//지붕에 뿌리 내린/풀꽃을 위해/풀꽃이 바라보는 풍경들 위에/막 눈을 뜬 세계를 풀어놓았으니,//아궁이에서/일렁이는 불길이/얼굴을 적셨으니/타고 남은 재를/흙바구니에 담아/공중에 흩뿌려놓았으니/수만개의 별빛이/하늘과 호흡하는/너의 폐부 속으로 스며들었으니//숨을 내뱉어라/올라가서 올라가서 이제,/바람에 뒤척이는 꽃밭이 되어라”(‘저녁 꽃밭’)
춤의 4요소는 여기에다 밥이 추가된다.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몸이 나비처럼 가벼워지는 것이다. 작업에 나가기 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기를 달랜다.
“한밤에 쌀 씻으러/포대를 열자/나방이 날아오른다/밤에만 무늬를 제 비늘 속에/새겨 넣으며/날아오를 날만 기다렸겠지/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반지하의 한켠에 쑤셔박힌 쌀포대/눅눅한 어둠속에서/일시에 날아오른 나방떼/배고픈 밤의 덧없는 출구 속으로/팔을 늘어뜨리고/기나긴 밤을 퍼낸다”(‘나방’)
준비가 끝나자, 시인은 무대 2층 3시 방향에 자리를 잡는다. 먹잇감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허나 쉽사리 나서지 않는다. 빛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포인트다.
“누가/발자국 속에서/울고 있는가/물 위에/가볍게 뜬/소금쟁이가/만드는/파문 같은//누가/하늘과 거의 뒤섞인/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모습을 보고 있는가,/누가/고통의 미묘한/발자국 속에서/울다 가는가”(‘빛의 소묘’)
삶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흔적 없이 우는 이의 눈물을 조명하듯, 시인의 눈빛이 무대의 뒤편을 훑고 지나간다. 거기 한 여자가 파도위에 잠들어 있다.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쇄골에 입술을 대고/잠이 든 여자는/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밤새 파도 속에서/물새알들이 떠밀려 왔다”(‘파도리에서’)
죽음과 탄생에 배어있는 이 치명적인 유혹. 종족 재생산의 부리 앞에 놓여있는 먹잇감의 가여운 눈망울. 야성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새는 부리를 크게 벌리며 알을 상상한다.
“그녀와 키스할 때면/이마에서,/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난다/뼈와 근육 너머로/내 영혼을 들여다보는/건기의 불꽃,/약한 기세가 있나/소혓바닥처럼/쓰윽 핥고 지나가는//야생에 눈을 뜨면 시작되는 여행”(‘달’)
이윽고 저지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비행이 시작된다. 절벽 소나무 사이에 도사리고 있던 송골매가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자, 새의 포효가 달을 절반으로 쪼개어 놓는다.
“근육은 날자마자/고독으로 오므라든다//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전율 사이/꽃이 거기 있어서//絶海孤島,/내리꽂혔다/솟구친다/근육이 오므라졌다/펴지는 이 쾌감//살을 상상하는 동안/발톱이 점점 무늬로 뒤덮인다/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동이일까/천길 절벽 아래/꽃파도가 인다”(‘춤’)
꽃은 공포에 떨고, 바다는 핏빛이니, 새는 고독하다. 연습일지라도 춤은 긴장과 팽창, 전율과 쾌감 사이를 비행하며 생의 절벽을 오르내린다. 꽃파도가 붉게 타오른다. 꺅!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