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문화산책] 흔치 않은 만남...정통 부조리극 ‘동물원 이야기’
[WP문화산책] 흔치 않은 만남...정통 부조리극 ‘동물원 이야기’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8.06.08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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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동물원 이야기' 공연사진 (사진=오떼아뜨르)
연극 '동물원 이야기' 공연사진 (사진=오떼아뜨르)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회색 벽과 검은 천으로 가린 문, 나무로 된 단 위에는 벤치 두 개뿐이다. 단출하고 아담한 무대를 인터미션 없이 꼬박 80분을 채울 배우도 단둘이다. 요즘에는 흔히 만나기 어려운 정통 부조리극 <동물원 이야기>의 현장이다.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1928~2016)의 작품으로 그가 발표한 첫 단막극이다. 이번 작품은 인간의 절대고독 문제를 두 인물의 만남과 충돌을 통해 구현했다는 맥락에서 원작을 충실히 따른 모습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청년 ‘제리’와 출판사 일을 하며 꽤 성공한 ‘피터’는 도시의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만, 불통과 몰이해로 제대로 된 온기를 나누지 못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서로 다른 환경을 대변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제리의 뜬금없는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동물원에 갔었어요.”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인물이 내뱉는 말에 어리둥절한 피터는 읽던 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대화를 원하지 않는 피터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리는 말을 이어간다.

“동물원에 갔었어요.” “걸어서 왔어요.” “제가 북쪽으로 걸어온 게 맞나요?”

낯선 사람의 앞뒤 없는 말과 맥락 없는 질문을 받은 피터는 수년째 자신의 벤치에서 누렸던 혼자만의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잠식당한다. 제리는 이야기마다 알듯 모를 듯한 주제의 그림자만 드리우고 논점 밖 주변부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정작 왜 동물원에 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관객도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빼앗긴 피터도 곤혹스러운 순간이다.

한참을 내달린 후에야 제리의 의도가 드러난다. 제리가 자신이 사는 하숙집과 이웃 사람들에 관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소유한 물건 하나하나까지 나열할 수 있을 정도인 처지와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키우는 개와 ‘관계 맺기’를 위해 고군분투한 대목 즈음이다. 관계의 단절, 소통의 부재, 계층의 고착화를 인생으로 체감한 제리는 누군가와 절실한 소통을 원하는 인물이다.

표피상 우연히 만난 것으로 보이는 피터는 사회규범 속에서 모범적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결핍과 고독감, 혹은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무기력감에 점철된 사람이지만, 단절된 삶을 살아온 제리의 일방통행식 거친 소통법에 불편을 느낀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껏 어이없어하면서도 끝끝내 제리의 말들을 듣고 있는 피터다.

제리는 이런 피터의 무감각한 반응들을 바꿔보려 온 힘을 다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의 개처럼 공격성 가득한 행동으로 상대를 자극한다. 수년간 함께 한 벤치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피터는 자신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극 중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수동적이었던 삶에 변화가 감지되는 장면이다.

<동물원 이야기>가 탄생한 시기는 1950년대지만, 인간의 절대고독과 단절, 소통의 부재, 세대 차, 빈부차, 계층의 고착화 등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면에서 오늘날 풍경과 다르지 않다. 관객이 이 정도 화두를 떠올렸다면 연출가가 바라는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다만, 일반 관람객이 공연장까지 얼마나 많은 발걸음을 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원작에 충실히 따라 작품의 안정성은 확보했지만, 현대인이 바쁜 시간을 쪼개고 돈을 들여 보러올 정도로 재미와 감동, 나아가 통찰을 주는가는 다른 문제다. 그저 사회문제를 환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관람객이 찾아주는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바란다면 해결해야 할 숙제다. 연극인이라는 에어리어 밖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면 보다 좋은 해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제리의 대사 중 “사람은 가까운 곳에 가기 위해 먼 곳을 돌아가야 할 때가 있어요” “사람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존재예요” 같은 존재론적인 대목과 몇 번의 웃음 포인트도 있다. 특히 두 배우의 열연은 단연 돋보였다. 혼신을 다해 소통하려 애쓰며 대다수의 대사를 감당하는 제리 역의 황원규, 그에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타성에 빠진 현대 중산층을 소환한 피터 역의 김태형의 연기는 훌륭했다.

한편, 이번 연극은 관객과 배우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오순한 연출가가 직접 번역하고 배우들도 번역에 참여했다. 내달 7월 2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오떼아뜨르에서 관람할 수 있다.

연극 '동물원 이야기' 공식 포스터 (사진=오떼아뜨르)
연극 '동물원 이야기' 공식 포스터 (사진=오떼아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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