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시인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시인
  • 북데일리
  • 승인 2005.12.1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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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에요. 전쟁은 무슨 이유나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어요. 통일을 가져온다 해도 나는 전쟁은 절대 반대야. 어떤 큰 선을 위해서도 전쟁은 반대요. 전쟁은 악이야. 그것이 나의 신념이오.”(리영희 선생의 ‘대화’중에서)

설악산의 ‘청년장교 리영희’를 노래했던 이성부 시인은 백두대간 남측 끝자락인 향로봉에서 “발길을 돌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라며 연작시를 접어야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수은주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향로봉 초소에서 아직 내려오지 못하는 이 있다. 이순의 신대철 시인이 원추리꽃 같은 확성기를 손에 쥐고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창비. 2005)며 내리는 저녁눈을 다 맞고 있다.

“눈보라에 밀려/동네 허공에 머물던 들새들/눈 덮이는 들판을 향해/구부러진 나무 꼭대기에 나란히 앉는다/그 나무 밑에 나도 나란히 앉는다//어깨에 쌓인 눈이 훈훈히 젖어든다”(‘저녁눈’)

새와 나무와 사람이 동구 밖 솟대처럼 오롯이 어둠에 젖고 있다. 시인은 나무에 기대어 별을 바라보다 어린 시절 보리밭으로 걸어들어 간다.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아저씨는 우릴 하나씩 높이 들어올려 너희 세상은 이만큼 높은 세상이라고 말했다, 높은 세상?......보리밭 물결 위에 높은 세상이?//보리 물결 타고 모두들/가물가물 흘러가버린 곳에/들도 없이 번지는/탱자 향기 노랗게 익어가는 음성,/그때 처음으로/영혼이 스쳐갔던 것일까,/우리와 아저씨를 한몸으로 세운 영혼이?//마른 흙바람 속에서/우리는 듣는다, 한점 고리섬을 넘어/백두대간 굽이쳐 올라갈 큰 영혼을”(‘고리섬’)

아저씨는 보리밭 물결보다 높은 세상을 정말 만들었을까. 누런 보리밭으로 놀란 개구리 오줌을 찍 갈기며 뛰어들고, 성긴 보릿대 사이로 구랭이 실실 기어가는 菩提(보리)의 물결보다 더 고요한 세상을 만들었을까. 그러나 아이들의 영혼의 바퀴는 폭격으로 바퀴벌레처럼 뒤집어져 있다. 그 자리에 핀 꽃이 닭의장풀이라니......

“아이들이 놀다 간 들판 초입에/보랏빛 남아 있다/달개비, 달개비//나는 흘러온 길을 다시 흘러온다//대처에서 온 아이/자전거 타고 앞서가고/웃자란 풀 쓸리는 소리//....../숨을 새 없이 엎드린 개울창에/산산이 흩어진 대처 아일 감싸 안고/초롱초롱 피어 있던 꽃//달개비는 여름 내내/대처 아일 불러내어/그 혼으로 피고 또 핀다”(‘달개비’)

기총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총소리와 물소리의 근원을 모르니 어둑서니의 공포가 밀려온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너는 누구냐!’

“물안개 속에 떠오른 공제선이/문득 남북으로 갈라선다.//......//....../가시철망 앞에 두고/마주보고 말도 없이/위험 표지판처럼 서 있는/우리는 누구인가?//....../지지난밤 불붙은 소나기에 머리 데고 오늘은 벙커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가슴 데는 그대, 나도 불기운 스친 얼굴 무심히 감싼다. 그대 마음 쏠리는 곳,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다보면 물 한바가지 마시고 엎어버린 고향 논두렁길에 이르리, 얼음판에 살구꽃 복사꽃 피우는 얼굴들 딸려오리......//......//그대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다던 그 사람은? 어머니도 애인도 아닌 그 사람은? 그대가 남긴 담배꽁초와 초조한 눈빛과 어두운 몸짓과 암호 속에 떨려오던 그대 목소릴 깊이 간직하리, 살아 있는 동안 떨리는 목소리 울려오는 곳에서 떨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꿈꾸고 피 흐르는 대로 시를 쓰리. 나를 넘어 그대를 넘어 이념을 위하여 이념을 버리고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잘가라, 두 깃발 사이/우리 땅 어디에도/있지 않았던 그대여,/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세월이 지나는 길목에 묻어두었던 숱한 불신의 부비트랩과 지뢰들이 바람의 눈과 발목을 잘라갔다. 그러니 이제 사소한 것에도 흔들리며 그대 흔들리는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흐르는 물 새로 만나면/물살에 따라나오던 얼굴/물 마르면서 억새에 붙어 있고/봄빛 타는 늪지에 묻어나고/흰제비란에 미간만 드러내네/나보다 먼저/바람에 불려가는 그대여/잘 가거라/길 가다 온몸 아려오면/그대 스친 줄 알리”(‘바람불이2’)

건 듯 부는 바람에 새는 눈을 털고, 솟대가 가리키는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훈훈하게 젖고 있던 눈과 나무와 사람 사이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모처럼 환한 저녁이 된다.

“소곤소곤/눈 위를 걸어가다/빙긋 웃는 새,//모두들 일행처럼 둘러선다, 언 사람과 햇살과 생강나무와 상처받은 사람과 찬바람 옆옆 봄사람이 번갈아 마주본다, 웃는다, 새 날아가자 사람과 사물 사이 사라지고 온기 가시지 않은 그 자리에 둘레만 남는다, 빙긋 빙긋 웃는 모습 같은”(‘새’)

향로봉에서 따스한 마음 한 자락 품고 사는 온정리로 내려가는 길에 새발자국 총총 새겨져 있다.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불씨 가득한 사랑의 둘레를 남기고 가는 그런......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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