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늙은 시인 가슴에 성냥 긋다
소녀, 늙은 시인 가슴에 성냥 긋다
  • 김현태기자
  • 승인 2010.05.05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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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 작가 박범신의 말이다. <은교>(문학동네. 2010)는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 이 문장 속의 '감히'는 사족이다. 소설이 인간의 욕망과 근원을 파헤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이 '감히'란 단어에서 이 소설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 때론 금기가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늙은 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 그리고 풋풋한 소녀 한은교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다. 이적요는 열일곱 은교에게 연정을 품고, 그로 인해 폭풍에 휘말린다. 이는 표지에 압축되어 있다.

한 젊은 여자가 서 있다. 뒷모습. 한 쪽 손으로 장막을 걷고 있다. 유채꽃 같은 연두빛 풍경. 다른 손으론 살이 비치는 흰색 원피스 한 쪽을 살짝 들고 있다.  한 남자가 꽃 풍경을 뒤로 한 채, 그녀(어쩌면 종아리)를 보고 있다. 여자의 엉덩이가 토실토실하다. 왼쪽 편엔 말 한마리가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다. - 표지

이적요는 어쩌면 작가를 투영한 인물이다. 도덕과 욕망의 경계인 살얼음을 아슬아슬 밟기로 한 셈이다.

그러나 감히 욕망을 드러낼 만하다. 욕망을 뛰어넘는 농익은 글 솜씨가 있다. 작가는 젊은 시절, 아름다운 연애소설 <풀잎처럼 눕다>(1980)를 낸 바 있는데, 이번 <은교>는 이후 30년간 담금질한 필력이 낳은 역작이다. '존재의 내밀한 욕망'이 불을 뿜는 장면을 소개한다. 은교가 시인의 가슴에 '문신'을 새겨주는 장면이다.

[너의 머리칼이 나의 이마와 어깨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명주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온몸의 죽은 세포들이 새벽 봄꽃처럼 깨어 일어나고 있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가슴팍이 반질반질 하세요."

나의 가슴살이 반질반질한 것은 사실은 검버섯이 피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세포들의 시신이었다. 그러나 죽은 세포들을 뚫고 솟아올라오는 생성의 낯선 바람 때문에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헤나로, 머리에 물을 들이기도 해요. 머리물도 들일까요?" "아니..." 나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너의 가슴이 내 어깨에 살짝 닿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움찔했다.

"가만히 계세요. 어른이 돼도 간지럼 타나봐요." 향기나는 너의 머릿결이 어깨, 이마를 먼저 비질하고 지나가자, 온화한 선지자처럼, 이번엔 가슴결이, 어깨를 쓱 스치고 머리께로 올라왔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열일곱 살이 될 가슴이었다. 그것은 넘치지 않고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남해의 태양빛이 잘 익힌 오렌지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자꾸 황금빛 오렌지의 원융한 테두리가 보이고, 바다로 내뻗은 팥알 같은 유두와 보라색 젖꽃판이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네 손등 위, 울근불근하던 피돌기처럼, 쏜살같이 내 시야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리고 차츰 팽창했다.

어깨에 닿았던 가슴이, 네가 위치를 바꾸는 데 따라 머리, 광대뼈를 건들고, 턱을 살짝 눌렀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손끝은 껍질을 벗겨내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으며, 입술은 오렌지 단물을 베어물고 싶어 지옥문처럼 굳었다. 향기가 네 머리칼, 가슴에서 났다. 쥐스킨트 소설 <향수>에서 완성된, 세상의 모든 시간을 해방시키는 '처녀의 향기'였다.

"저는요, 발목이 간지럼을 제일 많이 타요. 발목 뒤 옴씬 들어간 데요." 네가 말했고, '옴씬'이 기름통, 내 몸에 성냥을 그어대는 것 같은 효과를 금방 가져왔다. 나는 경악했다. 우회해서 표현하진 않겠다. 갑자기 나의...] 98~100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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