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365-25]맛있는 문장 '52종 세트' 맛볼래요?
[책읽기365-25]맛있는 문장 '52종 세트' 맛볼래요?
  • 김지우기자
  • 승인 2009.02.25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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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만든 다양한 코스 요리...<맛있는 문장들>

 

[북데일리]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문장과 장면이 있다. 부지런한 이들이나 글을 잘 쓰려는  이들은 반드시 필사해놓을 법한 좋은 글, 감명 깊은 글, 혹은 인상적인 글이다. 몸은 책을 오래전에 떠났지만 마음의 조각은 분리된 채 책갈피 속에 머물러 있다. 그리하여 가끔 그 조각을 찾아 가고픈 생각이 절실할 때가 있다. 떼어놓은 마음이 나를 부르는지 아님 내가 내 분신을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지만.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창비. 2009)는 소설가 성석제가 한번 머물렀던 책갈피, 늘 그리워했을 글을 모은 책이다. 뛰어난 문장들을 엄선해 온라인 독자를 대상으로 발송했던 ‘성석제의 문장배달’를 엮은 것이다. 이문구의 ‘우리동네 김씨’의 한 장면에서 심상대의 ‘양풍전’의 한 대목에 이르기까지, 총 52 편의 글이 저마다 기량을 뽐내고 있다.  ‘장르’가 다양해서 때론 독자를 웃기거나 숙연하게 하고, 때론 즐겁고, 긴 여운이 남게 한다.

글 잘 쓰는 작가를 한 자리에 모아 놓은 덕에, 팬들 입장에선 이름만 들어도 반가울 터이고, 대작가와 젊은 작가의 글을 일별해볼 수 있는 점 역시 매력이다. 김유정, 채만식, 황순원, 이병주, 박완서, 김승옥 이청준 이제하 그리고 김애란 백가흠 김연수... 열거하다 보니 마치 할인가로 파는 홈쇼핑의 52종 세트 같지만 속은 사두면 아깝지 않게 알차다.

엮은이 성석제는 작품마다 소감과 평을 달았는데, 읽는 맛이 ‘텍스트’ 못지않다. 문학집배원 답게 문학의 향기를 독자의 품에 잘 전하고 있다. 특히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들은 문학읽기의 팁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은 소설가 권여선을 발견하게 한 점이다. 책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N에게 말은 안했지만, 올해에도 나는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부터 긴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을 과연 휴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모욕에 결투로 응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그 깨끗한 변제에 대한 향수는 인류의 정신 속에 면면히 남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거나 보상금 몇푼 받아내겠다는 식의 유치한 계산 찌꺼기가 없다. 나를 모욕한 자를 죽이거나 모욕당한 나 스스로 죽이는 것만큼 모욕을 완전 연소시키는 방식이 또 있을까.

모욕이란 그런 것이다. 상대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칼이 둘 중 하나의 생명의 끊음으로써 모욕관계를 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휴가 또한 과거의 모욕에 대한 뒤늦은 결투신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골똘해져 수십년 전 어떤 친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나 행위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발견하고 불현 듯 떨치고 일어나 결투의 편지를 써보내는 늙은 신사처럼 내 결투신청에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목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모욕이 즉각 교환되지 못하고 시간의 회로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절박한 때가 적절한 때이다. 결투란 모욕이 가해진 시점이 아니라 모욕을 느낀 시점에 신청되는 것이다. -<분홍리본의 시절>중 단편 ‘반죽의 형상’ 중에서]

성석제 작가는 이 글을 두고 “문장 하나하나에 ‘통찰의 형상’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원본 소설에 대한 정보가 궁금해 검색했더니 다음과 같은 리뷰가 나왔다. 읽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사람들은 N과 내가 친하다는 걸 알면서도 둘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면전에서 하곤 했다.’ 이 작품은 여자들이라면 백번 공감을 하며 읽을 것 같은 작품이다. 남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반죽 속에 들어있는 두 형상처럼 서로 사랑하며 질투하며 미워하며 익숙해지는 그런 두 여자의 관계를...

사랑과 우정 사이라고나 할까. ‘남자와의 약속 때문에 나와 마지막 저녁을 먹지는 못해도 잠시라도 팔짱을 끼거나 허리를 안거나 손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기는 N의 형식적인 애정에 나는 가벼운 염증을 느꼈다.’ 언뜻 보면 가볍게 느껴지는 관계, 그런 단계를 어떤 단짝 동무 여자들끼리도 거쳐지나갈 것 같지만, 작가의 붓은 좀 더 거칠게, 좀 더 넓고 진하게 퍼진다. 작가의 힘이다. -네이버 블로거 ‘gindalai‘]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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