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365-20] 와인 향기 따라 발로 쓴 '견문록'
[책읽기365-20] 와인 향기 따라 발로 쓴 '견문록'
  • 김지우기자
  • 승인 2009.02.08 2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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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성지 탐방...와인 생각이 절로

[북데일리] 낯선 취미에 입문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와인이 특히 그렇다. 마치 유럽의 상징하면 떠오르는 성(흔히 볼 수 있는 와인 용어 중 '샤토'는 성-城을 말한다)처럼 담이 매우 높다. 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이러 저리 기웃거리며 성 안을 엿보려 하지만 늘 실패한다. 운 좋게 성 안을 봤다 해도 돌아서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가 뭔지 통 헷갈린다. 아마 와인에 대해 이런 경험을 가진 이가 적지 않으리.

와인이란 낯선 세계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방법이 있다. 와인 책 하나를 들고 혼자 외딴 섬으로 여행을 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한 권만이라도 끝내면 와인에 대해 조금 알게 된다. 백번 눈으로 보느니 한번 맛보는 게 낫은 것이 음식이지만 와인은 다르다. 와인 책 한 권을 읽는 일이 와인 네댓 병 먹는 것보다 와인에 대해 알 수 있다.

와인을 다룬 수많은 책 중에 <와인견문록>(이마고. 2009)이 있다. 알고보니 똑같은 제목으로 2004년에도 출간됐다. 두 책의 차이가 뭔지, 2004년 판을 읽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으나, 얼추 짐작 컨데 이번 책은 프랑스 보르도에서 이탈리아 토스카나까지 와인 '성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달리 보인다.

저자 고형욱은 내놓으라 하는 와인 전문가다. 그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와인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의미는 때론 배경과 문화,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살아난다. 한국에서 그 또래의 99%가 직장 일을 할 때, 저자는 와인 향기를 좇아 혼자 이국의 포도밭을 걸었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별나고 고독한 일이다.

책은 와인의 성지 보르도의 ‘로칠드 가문’ 이야기로 첫 장을 연다. 18세기 후반 대부호가 된 로칠드 가문의 한 사람이 ‘무똥’이란 포도원을 발판으로 와인 사업에 뛰어든다. '무똥 로칠드'란 브랜드의 탄생이다. 이어 그 설립자의 손자인 풍운아 필립남작이 무똥을 이끌며 와인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된다.

이중 필립이 '무똥'의 라벨 디자인을 유명 화가에게 의뢰한 아이디어는 매우 인상적이다. 후에 그것은 로칠드 가문의 전통이 됐다. 예컨대 1964년은 헨리 무어가, 1970년엔 마르크 샤갈이 그렸다. 특히 1973년 빈티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파블로 피카소가 장식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해마다 콜라병에 거장의 그림을 그려 넣다는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보르도와 쌍벽을 이루는 보르고뉴의 포도 향 역시 빼어나다. 특히 보르고뉴에서 주목 받는 ‘삐노 누아’ 품종 이야기는 기억에 남을 것이다.

'2004년 미국영화 <사이드 웨일즈>에서 주인공이 경배해 마지않았던 포도가 바로 삐노 누아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포도 품종과 달리 삐노 누아는 재배하기 까다로워 부르고뉴 지방을 떠나면 맥을 못 춘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와인광들이 부르고뉴 와인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 삐노 누아 때문이다.' 

세계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인 '로마네 꽁띠'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인사동에 가면 '로마네 꽁띠'란 와인바가 있다.) 보통 한 병에 수백만 원 하는 이 와인은 애호가에겐 '꿈'이다. 저자 고형욱은 현지에 가서 다른 나라 전문가들과 이 와인을 먹은 소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다들) 다른 와인들은 마시는 시늉만 하다가 남기기도 하더니 로마네 꽁띠만큼은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다. 로마네 꽁띠의 위력은 이런 것일까."

한 잔이 금쪽처럼 귀한 '신의 술'이니, 어찌 체면을 차리겠는가.

저자는 자신이 마셔본 와인 중에 "아직까지 그 맛과 향이 각인되어 있으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와인이 두 병있다"고 소개했다. 하나는 1961년 산 '에르미따쥬 라 샤펠'이란 긴 이름의 와인이고, 다른 하나는 1962년산 '라 따슈'다. 특히 후자는 영국 최고 와인 전문가 중 한 명인 마이클 브로드번트가 자기 생애 10대 와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는 후문이다.

와인 초보 독자는 와인을 그저 '술'로만 마셨다는 사실이 조금은 겸연쩍어질지 모르겠다. 수백 년 이어온 와인의 향기는 잔 하나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친다. 책을 읽다보면 새삼 와인 생각이 나고, 와인 한잔은 독서의 좋은 안주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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