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365-14]이정현 주연 '꽃잎'이 생각나는 책
[책읽기365-14]이정현 주연 '꽃잎'이 생각나는 책
  • 김지우기자
  • 승인 2009.01.27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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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의 충격

[북데일리] 현명한 사람은 책을 선물하기보다 도서상품권을 선물한다. 상대의 성장과정, 경제적 상황, 감정 상태, 지식의 깊이, 자의식의 문제가 책에 대한 독특한 기호를 형성한다. 그러니 특정 책이 상대의 입맛에 맞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가슴 벅찬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 책이 선물을 받은 이에겐 지루한 '숙제'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때문에 반응이 극과극으로 나뉘는 책이 종종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지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비밀노트>(까치.2004)는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어쩌면 42p쯤에서 구석으로 던져질지 모른다. 만약 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좋은 책 혹은 추천 책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엔 흔히 소설 앞뒤에 나오는 '배경 설명'이 없다. 무대가 어디인지, 주인공은 누구인지,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책 뒷 표지에 언론의 추천사에 곁들여 약간 나와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동유럽 나라 소속이다. 20여개 국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그 밖에는 '주인공인 쌍둥이의 폭력적 암흑세계와 삶의 비해' 같은 수식어들로 짐작해야 한다. 최소한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친절함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제법 유명한 책이니 만큼 인내하고 읽는 수밖에 없다. '까치'라는 출판사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는 크레딧이 없었다면 이 책은 아마 뭐가 뭔지 모를 책으로 치부됐을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이상하게도 국내의 베스트셀러에 대해선 신뢰를 못하지만, 세계적 베스트셀러라는 말엔 약하다.

소설은 엄마가 두 아이(쌍둥이 남자)를 친정 할머니에게 맡기면서 시작된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마저 받고 있는 '말종' 할머니다. 주인공인 쌍둥이는 꽃 하나 피지 않을 할머니의 척박하고 저속한 마음과 더럽고 황량한 환경 속에서 키워진다. 단련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다. 쌍둥이는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잔인하게 스스로를 갈고 닦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문제의 41p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웃집 소녀 이야기다. 언청이, 사팔뜨기에 콧물과 눈곱이 끼고 팔엔 부스럼투성이다. 1996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꽃잎'의 여주인공 이정현이 연상된다. (국내 출간 된 해가 1993년이니, 책이 혹시 영화에 영감을 주었을지 모르겠다.)

"소녀는 몸을 뒤집었다.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서 엉덩이를 개에게 내밀었다. 개는 앞발 두 개로 소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포르노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수간'이다. 그 장면을 주인공에게 들키자 소녀는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날 사랑하는 건 동물들뿐이야."

무대는 전쟁 중이고, 소녀는 구걸을 하며 살고 있다. 난리 통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작가는 소녀를 통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난 우유를 좋아해. 난 특히 젖꼭지를 빨고 싶어. 그건 딱딱하면서 부드럽거든"라는 대목에서 소녀의 처절한 상황을 실감한다.

쌍둥이 형제 역시 소녀 못지않다. 둘은 전쟁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잔혹한 경험 속에서 적응해나간다. 또래 아이들과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해 면도칼을 지니고 다니며, 급기야 남의 목을 면도칼로 긋는다. 아는 장교의 요청으로 엉덩이에 피가 튈 정도로 채찍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중 백미는 어머니와 작별. 눈앞에서 어머니가 폭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음을 맞이하지만 형제는 담담하다. 이는 곧 작가의 시선이기도 하다. 온몸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간결하고 냉정한 문체로 사건을 서술한다.

책은 빨리 읽힌다. 문체의 기교나 묘미는 없다. 강력한 메시지 앞에 두 단어는 설 자리가 없으며, 있을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집단 살륙 장면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쌍둥이의 질문에 작가는 성당 하녀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이에 대해 쌍둥이는 "우리는 영원히 아무 것도 잊지 못할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보듯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이다.

참고. 정혜윤 PD가 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푸른숲. 2008)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작가 은희경이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을 하고, 절박한 느낌으로 집을 나설 때 가져갔던 세 권의 책 중 한 권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정혜윤 PD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을 뻔 했다. ]

*이 책은 한 여자 대학생이 추천해준 책이다. "정말 기억에 남는 책"이라고 말했다. 읽다가 말다가 다시 읽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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