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계절, 목마른 청춘의 입맞춤
목마른 계절, 목마른 청춘의 입맞춤
  • 김지우
  • 승인 2009.01.19 0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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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박완서 첫 장편소설의 명장면


[북데일리] [책속의 포스트잇] 진이와 준식이 만난 때는 녹음 짙은 6월이었다. 캠퍼스엔 게으름이 흘렀다. 오후 휴강... 진이는 맥이 빠진 채 목적도 없이 대학 숲 속을 이리저리 헤치고 있었다. 까만 스커트에 흰 포플린 브라우스 차림. 진이는 단정하고 착실한 우등생이었다. 

진이는 준식의 코 코는 소리로 인해 재회했다. 준식은 신문지 조각을 덮고 잠을 자고 있었다. 진이는 낯선 이가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갑자기 코고는 소리가 멈췄다. 숨이 멎은 듯. 갑자기 불안해진 진이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렇게 해서 대화를 나누게 된 두 사람. 실은 둘은 딱 한번 본 구면이었다. 준식은 친구 항아의 남자친구였다. 

자신의 구역을 침입했다고 트집을 잡는 준식. 그의 꼬투리에 지지않고 말대꾸를 하는 진이. 알고보니 준식도 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책 속의 장면.

 "그런데 어쩜 모른 척할 수 있어요?"

 진이는 조금 반갑고, 아직도 좀 섭섭하다.

 "아는 척은 어떻게 하는 거지? 아차차.... 이 내 정신 좀 봐. 구면의 아가씨에게 하는 인사를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한 손으로 제 무릎을 탁 치며 수선을 떨더니 서서히 팔을 벌려, 멍청하게 앉아있는 진이를 반항할 겨를도 없이 난폭하게, 그러나 능숙한 몸짓으로 끌어안고 볼을 자기 입술로 지긋이 누르고 나서 놓아준다. 일순의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접촉은 일순에 지나가 버리지 않는 무엇을 남겼고, 진이는 그 무엇으로부터 민첩하게 자기를 수습하지 못해 한동안 멍했다. 따끔한 턱과 부드러운 입술이 잠시 볼에 닿았을 뿐인, 극히 단순한 접촉에 황홀한 기쁨이 있었다. 그건 전혀 예기치 않은 새로운 감각의 각성이었다.

 준식의 무심한 동작에는 날(刃)이 선 관능이 비장되어 있었고, 그 날이 드디어 진이의 감각의 생경(生硬)한 외각(外殼)을 찌른 것이다.

 그녀는 뒤늦게야 얼굴을 붉히며 발딱 일어섰으나 창피하게도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아릿한 아픔이 곁들었으면서도 비할 나위 없는 쾌미감의 여운은 아직도 싱싱하고 강렬하여 그녀는 거의 질식하고 말 것 같았다. 그녀는 신기한 듯이 벌렁 누워 있는 준식을 굽어 본다. p14

 진이는 그날, 마치 볼에 입술이 닿은 것 만으로 가슴에 화인(火印)을 입었다. 늘 그 순간을 생각했고, 준식이 당연히 그 뒤에 따라왔다.

준식은 좋은 집안의 귀공자다. 진이는 가난하고 평범한 집 딸. 두 사람이 이고 있는 하늘은 격랑의 6.25전란 전후의 시대. 준식은 부유하게 자란 자신을 좌익에 투항한다. 부유함이라는 콤플렉스로부터 역설적인 탈출의 몸부림이다. 진이는 좌익으로 의식화된 여대생. 그러나 세상은 완전치 않다. 좌익은 또한 수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진이는 좌익으로부터 벗어나자고 준식을 설득한다.

"내 몸뚱이가 노동자의 몸뚱이와 어떻게 다른가를 벌거벗고 비교하는 일은 아주 필요한 일이야. 적어도 나에게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어." -준식

"당신은 정말 미쳤군요?"-진 p107

준식과 진이의 진짜 입맞춤은 첫 볼키스 무대와 달리, 거칠고 무겁고 적요했다. 바위 틈서리 아카시아 그늘에는 한걸음 먼저 황혼이 오는가, 알맞게 어둑하다. 주위는 너무도 고요하고 둘 사이는 가깝다. 그리고 곧 별리(別離)가 있는 것이다.

진이의 감각은 떨고 있다. 그를 감지할 준비로, 그에의 갈구로.

"그럼 떠나버리겠군요.""응."
"인사해 줘요."
"잘 있어."
"그것 말고 있잖아요? 준식씨가 구면의 여자에게 하는 무례한 인사. 그걸 해줘요. 우린 이제 아주 구면이니까요."        

그녀는 눈을 감고 볼을 내밀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다가온 곳은 볼이 아니라 그녀의 입술 위였다. 둘은 서로를 애무하기에 똑같이 격렬했지만, 진이는 한층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설득이 소용없게 되자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가 여자라는 것으로 그를 잡아둘 수 있기를, 그에게 자기가 그만큼 매력적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길고 긴 입맞춤은 삽시간에 끝나고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곳에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그는 가버린 것이다. 이에 그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분하고 참담했다. 그를 영 놓치고 만 것이, 그리고 대담하게 과시한 자기의 여자로서의 매력이 그를 붙잡아 두기에 미흡했던 것이. -p108

박완서의 첫 장편 <목마른 계절>(1978년) 중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6.25전쟁이 나기 전인 1950년 6월부터 그 이듬해 5월까지 한 해 동안의 이야기를 달마다 엮고 있다. 전쟁의 비극과 그 보다 더 한 이데올로기의 허상이 가슴을 짓누른다.

진이와 준식은 나중에 한번 더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끝내 둘은 결합되지 못한다. 마치 남과 북처럼. 전쟁에서 꽃핀, 한송이 들꽃같은 사랑. 그 짧은 순간이 읽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TV리포트 제공>

*나는 이 책을 주말에 '우리시대 한국소설의 정신'이라는, 딱 맞는 부제가 딸린 <제3세대 한국문학>(삼성출판사. 1983년)을 통해 읽었다. 26년 된 책이니 당연히 낡았다. 활짜가 너무 작아 눈을 찌른다. 지금 시대의 거장 박완서가 당시 제3세대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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