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전 서울에서 동성애가 유행했다?
80년전 서울에서 동성애가 유행했다?
  • 김대욱 기자
  • 승인 2008.07.04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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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뒤흔든..>, "이익 있으나 해 없다 생각해"

[북데일리] 1931년 4월 8일, 두 여성이 철도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홍옥임(21)과 김용주(19). 둘은 동성애자였다. 자살 원인은 서로 겪고 있던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된 후 사람들은 제각각 원인을 분석 했다. 대부분 강제 결혼과 남편의 무관심, 감상적 허무주의 등을 꼬집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난을 하지 않았다. 요즘도 동성애하면 색안경을 끼고 수군거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 어떻게 된 걸까.

역사학자 이철은 ‘동성애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 분위기‘를 그 이유로 꼽는다. 그는 저서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다산초당. 2008)에서 “당시 동성애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며 “동성애는 이익이 있을지언정 해는 없는 관계라는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남학생보다 여학생 사이에서 동성애가 유행했다. 관계가 형성되는 주요 장소는 학교와 기숙사. 여기서 여학생들은 엑스 형제를 맺으며 우정과 애정을 쌓아갔다. 엑스 형제란 “학기 초가 되면 선배가 신입 생 중 마음에 드는 학생을 골라 여럿 앞에서 공개적으로 형-동생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는 집단 내에서는 애정 발표 여겼다.

저자는 동성애가 가장 활발했던 학교로 이화학당, 경성여자고보, 평양여자고보 등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동성애가 평생 지속된 건 아니었다.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곤 했다.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시각은 1930년대 후반 주춤했다. 프로이드와 서양 의학의 영향 때문이었다. 동성애가 병적 상태이자 생리적으로 좋지 않은 현상이라는 인식이 남성을 중심으로 늘어 갔다.

그러나 그 전까지 동성애 인기는 식지 않았다. 결혼식까지 올린 여성 동성애자도 있었다. 다음은 1932년 6월 월간지 ‘여인’에 실린 기사 일부다.

“김모 씨의 부인 정순임과 김씨의 부인 장경희와는 오랫동안의 독수공방을 해오다가 두 사람이 그 사회에서 연애를 하게 됐다 한다. 그러다가 이 두 부인은 정식으로 결혼까지를 하게 됐는데 정씨가 신랑이 되고 장씨가 신부가 돼서 각각 고래식으로 예복을 입고 요리집에서 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책은 당시의 다양한 연애사건을 훑는다. 한 장씩 읽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연애 감정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제공=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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