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갈비, 4.19혁명이 낳은 음식?...분당 정자동맛집 ‘도담 참숯닭갈비 봉평막국수’
닭갈비, 4.19혁명이 낳은 음식?...분당 정자동맛집 ‘도담 참숯닭갈비 봉평막국수’
  • 정지은 기자
  • 승인 2016.09.0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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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정지은 기자] "닭의 갈비는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깝소. 공은 돌아갈 결정을 내릴 것이오.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

이 말을 한 사람은 양수(175년~219년), 후한말의 재사이다. 양수가 말한 ‘공’은 바로 위무제 조조다. 당시 조조는 촉의 유비와 한중을 놓고 쟁투했는데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한중을 취하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한중에 발목 잡힌 꼴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저녁, 하후돈이 암어를 정해달라고 하자 저녁으로 나온 닭갈비를 먹고 있던 조조는 무심코 계륵(鷄肋)이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주부(主簿) 양수가 한중을 닭갈비에 빗대 저 말을 했고 과연 다음날 조조는 철군 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계륵 고사로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서 유래한다. 이 얘기는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각색되어 옮겨졌는데 소설에선 조조가 양수의 재능을 시기하여 참한 걸로 나온다. 정사에서도 양수가 죽임을 당하긴 하지만 시기는 다르다.

닭갈비는 먹을 게 없다는 말은 자칫 닭을 취급하는 업체를 화나게 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 고사가 실린 후한서는 닭갈비 요리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훗날 황제로 추존되는 인물의 상차림에 들어갈 정도로 닭갈비는 고급요리였다.

한국에서 닭갈비요리는 임기응변으로 탄생했다. 춘천시가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춘천 식 닭갈비 요리는 1960년 시작된다. 당시 춘천에서 돼지고기 집을 하던 김영석 씨는 4.19혁명의 여파로 돼지고기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상대적으로 저렴한 닭으로 돼지갈비를 대체해 숯불닭갈비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인기를 얻어 여기저기 퍼지더니 1971년, 무쇠 닭갈비 판이 등장하면서 철판 볶음 요리로 변신해 오늘에 이른다. 따지고 보면 4.19혁명이 닭갈비 요리 탄생에 일조한 셈이다.

닭갈비는 처음 탄생할 때부터도 계륵 고사처럼 ‘먹을 게 없는’ 음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싸고 푸짐하게 영양보충을 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갈비라는 이름이 있지만 닭갈비가 처음 만들어질 때 이미 넓적다리와 갈비, 가슴살을 포함한 부분을 납작하게 눌러 ‘대’라는 이름의 기본 단위로 삼았던 것이다. 한 마리의 닭이 두 대인 셈이다. 닭 가슴살에는 두뇌활동을 촉진하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껍질에 숨은 콜라겐은 피부 미용에 좋다. 리놀렌산은 성인병 예방에 좋다. 혈액의 점도를 유지하고 인체의 생리활성기능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닭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탄생 초기, 춘천 닭갈비엔 ‘서민갈비’란 별명이 생겼다.

분당 맛집 ‘도담 참숯닭갈비 봉평막국수’는 서민갈비란 별명이 붙었던 시절의 숯불닭갈비를 재현했다. 국내산 생닭 넓적다리 살에 양념을 하고 참숯에 올려 상에 내는데 직접 개발한 양념이 닭갈비 맛집이 된 비결이다. 과일과 와인을 포함해 20여 가지 재료로 만든 양념을 1주일동안 숙성시키고, 고기에 재워 또 하루 숙성해 손님상에 내어 놓는다. 숯불닭갈비 외에도 국물닭갈비 양념과 막국수 양념 모두 10여년 요식업에 종사한 유은희 대표가 오래 연구한 끝에 만들어냈다.

정자동 ‘도담 참숯닭갈비 봉평막국수’는, 넓은 실내를 갖추고 있고 접근성도 좋아 직장인들의 회식장소, 가족 외식장소, 데이트 장소로 널리 추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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