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작가 배홍진 "소설은 하나의 건축"
유령작가 배홍진 "소설은 하나의 건축"
  • 북데일리
  • 승인 2008.06.02 1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덕경 할머니가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북데일리] 유령이 유령을 만났다. 작가 배홍진. 그는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세상에 그가 쓴 글은 있되, 이름은 없었다. 남의 책을 써주는 대필 작가, 즉 유령 작가가 그의 직업이었다.

작가가 만난 유령은 고 강덕경 할머니. 열다섯 나이에 일본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일생을 유령처럼 산 인물이다.

그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간은 단 5년.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하며 알려진 1992년부터 199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다. 그 전까지 그녀는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둘이 얼굴을 맞댄 건 지난해 7월이었다. ‘나눔의집‘이 낸 화집에서 작가는 할머니의 사진과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을 처음 봤다. 이때 쓸쓸함을 간직한 할머니의 눈은 보는 순간 강렬한 연민을 자아냈다. 할머니의 그림을 매개로 그녀의 삶을 더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멘토. 2008)의 집필은 그렇게 시작됐다.

“강덕경 할머니에 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최근 홍대 인근 카페에서 만난 배홍진은 쉽지 않았던 준비과정부터 털어놨다. 그에 따르면 위안부에 관련한 자료는 많았다. 하지만 학술적 논문이 대부분. 온전히 한 개인의 삶을 다룬 자료는 적었다. 특히 강덕경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그만큼 숨죽여 살아왔다는 증거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뒤졌다. 부족한 자료는 상상으로 채우기로 했다. 그러나 멋대로 꾸밀 수는 없는 노릇. 최대한 할머니의 숨결에 젖어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목소리 청취와 발품 팔기다. 그는 준비과정 내내 영화 ‘낮은 목소리’에 나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 듣고 다녔다.

“사람이 펄떡펄떡 살아 있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할머니를 만나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에 예민해질 필요가 있었죠.”

답사 또한 많이 했다. 준비기간 중 작가는 할머니의 고향 진주 수정동은 물론 그녀가 살았던 부산, 입원 생활을 했던 병원, 묘소가 있는 산천군, 나눔의 집, 수요집회 현장을 떠돌았다. “공기를 느끼려 했다”는 그는 하루 종일 수정동을 서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두 달 반. 10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역시 고난이었다. 돈이 없어 여관방과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시시때때로 심해지는 난독증도 그를 괴롭혔다.

이후 12월, 첫 번째 원고가 완성됐다. 하지만 그는 이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이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주관적인 에세이 같아서 버렸어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여야지, 내 산문집이어선 안 되잖아요. 할머니를 되살리고 싶은 욕망이 컸어요.”

1월 말, 새로운 원고가 나왔다. 지금 책의 전신이다. 작가의 바람대로 할머니는 “투사가 아닌 서글픈 인생을 살다 간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유령 생활을 청산했다. 다음에는 원래 계획이었던 소설로 독자를 만나려 한다. “소설은 하나의 건축”이라고 말하는 그의 소설은 어떤 모습일까. 오랜 시간 갈고 닦은 문장으로 지어낼 그의 소설 세계가 기대된다.

[김대욱 기자 purmae33@pimedia.co.kr]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