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우리는 벽장 속에서 행복했다'... 벽 속에 20년 간 숨어 살았던 모녀
[삶의 향기] '우리는 벽장 속에서 행복했다'... 벽 속에 20년 간 숨어 살았던 모녀
  • 이수진 기자
  • 승인 2016.07.21 0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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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이수진 기자]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안네의 일기>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벽속에 있는 집에서 8명이 숨어 살았던 이야기를 소녀가 쓴 기록이다. 청계천 사람들의 삶의 기록을 담은 인터뷰집 <마지막 공간>(김순천외. 삶과 창. 2004)에도 <안네의 일기>처럼 벽속 방에서 살았던 모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연은 이렇다.

청계천에서 20년 넘게 다방을 하는 아줌마가 있었다. ‘장군지’로 불리는 아줌마는 젊은 시절 한 남자를 사랑했다. 딸도 태어났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남자는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장군지 아줌마는 남자를 떠났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던가. 장군지 아줌마는 먹고 살기 위해 청계천에서 다방을 시작했다. 다방이라는 곳이 남자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장군지 아줌마는 딸을 지키기 위해 벽속에 있는 쪽방에서 딸을 키웠다. 쪽방은 다방 벽에 있는 커다란 거울 2개로 가려져 있었다. 엄마와 딸만 아는 비밀공간이었다. 딸은 학교로 도서관으로 돌다 손님들이 다 가고 난 늦은 밤, 쪽방에 들어 올 수 있었다. 그곳에서 20여 년 간 살았다.

쪽방은 한 사람 정도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천장에는 누렇다 못해 시커멓게 물이 샌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오래된 비키니 옷장과 낡은 골동품과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보일러 대신 한 겨울에 사용했던 전기판넬이 바닥에 깔려 있고 불빛마저 희미했다. 방이 아니라 무덤 같은 곳이었다.

지은 죄도 없이 벽 속의 방에서 살아야 했던 모녀는 행복했을까. 나치 비밀경찰에 발각되어 잡혀갔다 혼자 살아 남은 안네의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는 벽장 속에서 2년간 행복했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장군지 아줌마도 행복했다. 비록 게슈타포에 쫓기는 안네처럼 살았지만 딸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가진 것 없는 모녀가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외부의 시선과 경제적 고통으로 고달프다. 그럼에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서로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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