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희곡나라]⑦제일교포의 부유하는 정체성
[장정일의희곡나라]⑦제일교포의 부유하는 정체성
  • 북데일리
  • 승인 2008.04.2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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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재일교포 작가 정의신의 <정의신 희곡집>(연극과 인간. 2007)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 희곡집에는 도합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교포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작품의 줄기로 삼고 있다.

희곡집의 첫머리에 놓인 <아시안 스위트>는 지방도시의 쇠락해가는 한인마을에 위치한 양장점이 무대다. 양장점의 주인 치요코는 40세가 넘은 노처녀다. 술주정꾼이었던 아버지가 부부 싸움을 한 뒤 어린 치요코를 자전거에 태우고 가다가 사고가 난 뒤로 절름발이가 됐다.

치요코의 어머니 미쓰코는 남편의 주사와 폭력에 넌더리를 내고 어린 딸과 아들을 버린채 집을 나가서,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딸을 찾아 온 걸 보면 현재의 결혼 생활도 평탄하지는 못한 눈치다.

또 막내아들 시로는 나이가 30세인데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고 번질나게 누나에게 신세를 지러 온다. 그런 치요코의 양장점에 는 어린 시절 서로 짝사랑했던 아사다가 동거하고 있다. 그는 같은 도시에 자신의 집과 아내가 있는 유부남인데, 아내와의 불화를 핑계로 치요코의 양장점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 역시 지방도시에 불법으로 지어진 한인마을이 무대다. 치요코의 결혼과 함께 한인마을이 헐려나가게 되는 <아시안 스위트>의 결말처럼, 이 작품의 한인마을도 시에서 공원을 만들기 위해 강제 퇴거될 위기에 놓여 있다.

강제로 징용을 당하고 팔까지 잃은 구니오는 “내 팔도 모자라서 땅까지 빼앗을 거야!”라고 시청의 측량기사에게 항변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강제집행”과 “퇴거명령”뿐이다. 일본 내에서 갖는 재일교포의 이런 불확실한 위치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정의신 작품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파괴적이고 도피적인 주인공들의 의식이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아시안 스위트>에서 사생활이 난잡하던 어머니, 20대엔 영화 배우를 꿈꾸다가 30대가 되어서는 미국으로나 가야겠다는 남동생, 오쟁이진 유부남이 절름발이 치요코의 양장점에 모였듯이 <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외팔이 남편 대신 술집 접대부를 하는 후유에(장녀)의 집에 온 가족이 모여 산다.

거기에 걸핏하면 부부싸움을 하고서 트렁크를 들고 찾아오는 나쓰에(사녀)와 그녀의 동거남 히로시가 합세한다. 전작에 나온 치요코의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술주정꾼이었듯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절름발이 하루에(삼녀)의 동거남 쇼지 또한 아내가 재봉질로 번 돈을 뜯어 빠찡코로 달려가는 백수건달인데다가 폭력마저 서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에와 히로시는 불륜을 맺고, 차별이 없는 “그 곳”, 북한으로 가자고 맹서한다.

정의신의 작품은 재일교포가 겪는 차별의 벽을, 그들이 인내하는 일본 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재일교포 사회와 가족이 서로의 불신과 증오에 의해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중심에는 항상 ‘콩가루 집안’이 있다.

흥미롭게도 정의신과 똑같은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몇몇 희곡에도 그런 모티브가 등장한다. 그들의 작중 인물들은 차별적인 일본 사회를 공격하기보다 그저 “환경이 인간을 키우는 거예요. 열악한 환경은 열악한 인간을 낳는 거예요. 실제로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제대로 된 사람이 누구 하나라도 있나요?”(히로시), “여기에 있으면 다 썩을 뿐이야!”(다쓰오), “최악이야, 최악, 이 동네 사람들은 정말 모두 구제불능이야!”(미도리)라고 말하며, 서로를 파괴(자해)하거나 어디론가 도피한다.

<가을 반딧불이>는 손님 없는 강변의 보트 대여소가 무대다. 29세의 다모쓰는 50세가 훨씬 넘은 슈헤이 삼촌의 보트 대여소에서 20년 넘게 더부살이 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여름이 저물어가는 보트 대여소로 실직과 이혼을 한꺼번에 당한 40세의 중년남 사토시가 막무가내로 엉겨붙고, 사기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39세의 마스미도 합세한다. 슈헤이는 무작정 엉겨붙는 사토시를 보면서 “왠지 몰려온답니다. 이 연못으로…버림받은 것들이…”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정의신의 작품 전체를 요약하는 약어다.

앞서 정의신의 작품은 일본 사회를 향한 칼날이 일본 사회를 겨누지 않고, 재일교포 사회 혹은 가족 내부로 향해진 자해면서 도피라고 썼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자해의 대표적인 양상이라면, 술․도박․애욕․ 영화(미국문화)․스포츠(뒤에 나올 <인어전설>의 권투)와 함께 <겨울 선인장>에서 두드러지는 ‘호모 문화’에 대한 경사는 도피의 여러 양상이다.

게이는 앞서의 <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에도 이미 나오지만, <겨울 선인장>에서는 네 명의 호모가 등장한다. 작중에도 나오듯이 이들이 호모일 뿐 아니라 재일교포라는 중첩된 설정이야말로, 재일교포의 소외되고 부유하는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정의신 희곡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인어전설>은 2000년대에 쓰여진 앞의 네 작품과 달리 유일하게 1990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여타의 작품과는 무려 15년 정도의 시간차가 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읽기로는 이 작품집에서 가장 싱그럽고 패기가 느껴지는 청춘의 작품이 바로 <인어전설>이며, 향후 정의신이 쓰게 될 작품의 원형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작품이다.

무기력한 아버지, 게이바에 일하면서 집안의 살림을 돌보는 세쓰오(장남), 배우가 꿈인 하루오(차남), 알 수 없는 복수심을 달래기 위해 권투에 몰입하는 나쓰오(삼남), 경마장에 출입하는 아키오(사남) 등이 모여사는 이 ‘콩카루 집안’에서는 누나 미즈메와 육남 시키오의 근친상간이 암시되고 누나는 그 괴로움 때문에 물에 빠져 자살한다.

그리고 삼남 나쓰오는 동생 아키오의 애인을 겁탈하고, 아키오는 형에게 복수하기 위해 권투를 배운다. 두 사람이 링에서 대결 하게 되자 어머니는 “그만! 제발 그만해! 형제끼리 상처주고. 난 너희가 서로를 미워하라고 키우지 않았어”라고 울부짖는다.

위에 인용된 대사는 <가을 반딧불>에서 슈헤이가 했던 “가족이란 건 모두 거짓으로 이어져 있는 거였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에 대항하지 못하는 정의신의 작품이 작가 의식의 한계로 지적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곧 형제간에 상처주고 미워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역설은 섬뜩하다.

다시 말해 재일교포와 같은 일본 사회의 주변인에게는 가족이란 견고한 인륜적 구조물마저 용납되지 않는다는 인식은 굉장히 수위가 높은 고발이다.

정의신의 작품에는 체홉의 작품이 늘 그랬듯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솟구쳐나는 낙관이 오히려 비애를 더하곤 한다. 예를 들자면

“난 가끔씩 생각해. 백 년, 이백 년 미래에 태어난 사람들한텐, 우리가 겪은 지금의 괴로움이나 외로움이 시시한 것이고…하찮은 일이겠지만…그렇지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덕분에, 백 년, 이백 년 미래의 우리가 행복해 지는 거라고….”(<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하루에)

“도심에서도 아직 이렇게 별이 빛나는 곳이 있어서…그 별을 바라보면…아름답고…슬프고…그러니까 너도 그것을 보러 나와, 하고…그래도 아직은 살 만하니까…엄마는 속았지만, 그걸 지금은 원망도 하지 않고…운이 나빴던 일, 안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 죽고 싶었던 일, 별 만큼이나 많을지 몰라도…그래도 살만 하니까…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가을 반딧불이>,마스미)

“몇 번이고 쓴물을 마시게 되는거야.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거야. 물은 투명하니까 마셔 봐야지 그 맛을 알 수 있지. 하지만 목이 마르면 마시지 않을 수 없어. 마시기를 싫어하는 인간은 살아나갈 수 없지. 우리들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쓴물을 마셔왔어. 그래도 살아나가야, 살아나가야 하는거야.”(인어전설>,아버지)

같은 근거 없는 희망이 그렇다.

체홉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파티가 몰락의 전조를 확실히 해주었듯이, 정의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조촐한 축하연 역시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미봉책이거나 이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듭 체홉을 연상시켰다.

[소설가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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