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밤, 시인과 나누는 `소주병`
10월의 마지막 밤, 시인과 나누는 `소주병`
  • 북데일리
  • 승인 2005.10.3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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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일이 힘이 들 때, 함께 나누는 술 한잔은 큰 위로가 된다. 골목길 포장마차에 들어가 공광규 시인과 함께 2004년산 <소주병>(실천문학)을 들고 병나발을 불어 보자.

“가난한 어머니는/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학교에서 돌아온 나를/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국물 속에 떠 있는 별들//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배가 불렀다//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어머니의 눈에서/별빛 사리가 쏟아졌다”(‘별국’)

식구처럼 우리를 맞이하는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보면서, 자식의 밥상 곁에서 아파했던 어머니의 눈물로 빚은 국물을 뜬다. 빈병은 하나 둘 쌓여가고...

“술병은 잔에다/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속을 비워간다//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길거리나/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문 밖에서/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나가보니/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빈 소주병이었다”(‘소주병’)

아버지는 살아생전 무너진 논둑을 쌓으려고 애썼지만, 빈 가슴에 소주병만 채웠으리라.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삽으로 퍼올리는데/흙 속에서 누군가/삽날을 자꾸 붙든다//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논둑을 지탱해오던/아버지가 박아놓은/썩은 말뚝이다//썩은 말뚝 위로/흙을 부지런히 퍼올려도/자꾸자꾸 빗물에/흘러내리는 흙//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세상일처럼 쉽지 않아/아픈 허리를 펴고/내 나이를 바라본다//살아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흑, 하고 운다” (‘썩은 말뚝’)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의 둑이 무너진 듯 취기가 확 밀려온다. 안주라도 먹으면서 술을 마셔야 할 텐데......

“큰 고기는 낚싯줄을 끊거나/그물을 찢어버린다/큰 나방은 등잔불을 끈다/힘센 소는 외양간을 부수고 뛰쳐나간다//이렇게 큰놈들은/낚싯줄에 걸리지 않고/그물에도 잡히지 않고/빛에 현혹되거나 갇히지도 않는다//작은 인정에 취하고/작은 비난에 상처받고/작은 욕망에 갇히는 나는/큰놈 되기 다 틀렸다.” (‘큰놈’)

보다 못한 아주머니, 오돌뼈가 앙큼하게 박혀있는 삼겹살 큰놈을 불쑥 내어놓는다.

“양돈장에서 얻어온 삼겹살을 굽는데/헌 구두를 잘라 구운 가죽 맛이다/젖꼭지가 붙어 있는 걸 보니/누린내 나는 수퇘지 뱃가죽이다//‘어머니,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어요.’ ‘정을 너무 많이 넣은 돼지라 그려’//마당가에 나와 오줌을 누면서/뱃가죽을 자꾸 만져본다/가까운 날 무덤 속 미생물들은/내 뱃가죽이 질기다고 투덜거릴 것이다”(‘수퇘지’)

고단한 지 아주머니는 등 돌리고 앉아 졸고, 카바이트 불빛도 잦아지는데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첫눈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바다/모래 위에 뒹굴며 엉엉 우는 빈 소주병/....../따뜻한 것이 그리운 눈발 몇 개가/비틀비틀 주막 안으로 불을 쬐러 왔다가/자리에 앉기도 전에 녹아버렸다/‘인생은 연탄불 위에 내리는 눈발 같아요’/....../비틀거리는 눈송이 하나가/다른 술집 몇 개를 거쳤다 오는지/술잔을 받기도 전에 잔 속에 몸을 푹 던졌다”(‘겨울 대천’)

잔속에 푸욱 절여진 그녀를 부축해서 포장마차를 나오니,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온몸에 눈을 매달고 강아지마냥 숲을 뛰어다니는 사람들.

“이렇게 죽은 나무도 바위도 철탑도/벚나무도 수수꽃다리나무도 신갈나무도/목련을 피워보는 것이다//오랫동안 비워 있던 의자도/쓸쓸한 계단도 눈을 얹혀서/부드럽고 따뜻해져 보는 것이다//사람도 움직이는 나무가 되어/짐승처럼 머리에 흰 꽃을 달고/도시의 밀림을 헤매보는 것이다” (‘폭설’)

시인은 따뜻한 말이 나무가 된 겨울숲에 가서, 상처받은 사람의 생을 새벽시장 잉걸불처럼 따뜻하게 데워주고 싶다고 그녀에게 속삭입니다.

“마음으로 만졌을 때/악기처럼 아름다운 당신/몸 속에서 튀어나온 부드러운/말씨 한 알이 어느새/들숨 날숨 통해 내 몸 속/허파꽈리거나 위벽에 붙어/가는 뿌리를 내리고 잔가지를 뻗는다 했더니/내 마음 천장까지 뚫고 자라/큰 나무가 되었습니다/....../한 아름 커진 당신을/마구 안아보다 감당이 안 돼/그 나무 아래로 가서/....../오래 오래 머물거나 장작으로 패서/남은 생애를 따뜻하게 데우거나/관을 짜서 함께 썩으려고 합니다.” (‘따뜻한 말씨’)

추운 날, 시인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술 한 잔이 훈훈합니다. 이 밤, 삶의 모퉁이에서 흐느끼고 있는 소주병, 그 어깨를 살며시 토닥여주고 싶습니다.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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